엔젤로보틱스의 웨어러블 보행 재활 로봇 '엔젤렉스 M20'. 사람이 특정 동작을 하면 로봇이 의도를 파악해 그에 맞는 힘을 보조한다. 사람을 로봇에 맞추지 않고 로봇이 사람에 맞추는 것이다./조선비즈

뇌졸중, 뇌성마비를 앓거나 다쳐서 수술을 받은 환자는 거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감각과 운동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있어서다. 몸이 말을 듣지 않거나 이동이 불편한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으로 최근 로봇이 사용되고 있다. 옷처럼 입는 웨어러블(wearable·착용형) 재활 로봇도 그 중 하나다. 걸을 힘이 부족한 환자와 노약자가가 입고 운동하거나 재활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보행 재활 로봇들은 대부분 정해진 동작을 단순히 반복하도록 개발됐다. 수술을 받은 환자가 무릎을 펴거나 구부리는 동작을 반복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기계적 동작에 집중하다 보니 환자 의도나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람을 로봇에 맞춘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공경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로봇을 사람에 맞추는 기술을 연구했다. 로봇이 환자가 원하는 보행 형태를 파악하고 최적의 자세로 필요한 만큼 힘을 보탠다. 이를 통해 편의성은 물론 재활 효과도 극대화했다. 공 교수는 ‘사람에 맞춘 로봇’을 목표로 재활 로봇 전문 기업인 엔젤로보틱스를 창업했다. 회사가 개발한 로봇 엔젤렉스 M20은 이미 전국 70곳이 넘는 의료기관에 들어갔다.

◇환자 의도 파악, 사람 맞춤형 로봇

과학자들은 사고를 겪거나 병을 앓아 움직임이 불편한 환자가 일정한 동작을 반복로 훈련하면 운동능력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면 망가진 뇌 신경계에서 뉴런(신경세포)이 다시 연결되면서 약화됐던 운동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바로 ‘신경 가소성’이라는 개념이다.

엔젤로보틱스 설립자인 공경철 교수는 신경 가소성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꿨다. 단순히 기계가 요구하는 수동적인 동작을 반복하기보다 환자 자신의 의지로 동작을 해야 신경 가소성이 발휘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이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재활 로봇 엔젤렉스 M20을 개발했다.

엔젤렉스 M20에는 사람의 의지를 이해하고 보조하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들어있다. 웨어러블 로봇은 발바닥에 접촉 센서가 있다. 환자가 걸을 때 발바닥에 가해지는 미세한 힘의 변화와 움직임으로 동작 의도를 읽는다. 로봇이 환자의 의도에 따라 미리 입력해둔 걷기 동작 8가지를 포함해 모두 40가지 동작에 맞는 힘을 제공한다. 로봇이 환자의 의지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사람이 로봇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엔젤렉스 M20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난 2022년 의료기기 허가 중 가장 까다로운 3등급 허가를 받았다. 이어 뇌졸중 환자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선별 급여 목록에 올랐다. 소아뇌성마비와 파킨슨병, 길랭-바레증후군, 척수손상 환자도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주요 대학병원을 비롯해 70곳이 넘는 의료기관에 80대가 납품됐다. 얼마 전 소아뇌성마비 환자 100여명이 참여한 임상시험을 마쳤는데 연구진은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엔젤로보틱스가 성공적으로 임상시험을 마친 데는 정부 4개 부처가 설립한 범부처 전주기 의료기기 개발사업단의 역할이 컸다. 의료기기가 상용화 되려면 반드시 임상시험을 통해 검증해야 한다. 범부처 사업단은 엔젤렉스M20의 사회적 공헌 가능성에 주목했다. 회사의 임상시험 검증을 지원하면서 정부의 각종 인증 절차를 통과하도록 행정 절차도 지원했다.

엔젤로보틱스는 국내 성과를 바탕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먼저 연말까지 말레이시아에서 임상시험을 마칠 예정이다. 동남아시아 허가·인증 획득에 영향을 미치는 CE(유럽 통합 규격품 인증마크) 인증 획득도 막바지 단계에 있다.

엔젤로보틱스의 공경철 대표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수요자는 물론 앱(app, 응용프로그램) 개발자까지 아우르는 기술 생태계를 만들었듯, 헬스케어 로봇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 시장까지 만들겠다고 밝혔다./조선비즈

◇헬스케어 로봇 기술 생태계 구축 목표

공 대표는 서강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제어이론과 로봇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2011년부터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2019년 KAIST 기계공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2017년 SG로보틱스를 세우고 이듬해 엔젤로보틱스로 사명을 바꿨다.

“창사 초기에는 보행 보조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조기를 쓰면 나중에 계속 의존하게 된다면서 거부하는 환자들이 있었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듣고 보조기가 또 다른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치료’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실이 엔젤렉스 M20입니다.”

지난 18일 대전의 엔젤로보틱스 선행기술연구소에서 만난 공경철 대표는 “헬스케어 로봇은 사람을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개발 난도가 높지만,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만든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엔젤로보틱스는 일상에서 재활 치료를 돕는 신제품을 곧 출시할 계획이다. 공 대표는 “지금은 주로 대형 병원에서 재활 로봇이 활용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누구나 헬스장에서 운동 기구를 사용하듯 보행 재활 로봇이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웬만한 동네마다 재활 센터가 있어 재활 훈련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공 대표는 한국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고 전망했다.

공 대표는 중·장기적으로 헬스케어 로봇의 플랫폼과 생태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수요자는 물론 앱(app, 응용프로그램) 개발자까지 아우르는 기술 생태계를 만들었듯, 헬스케어 로봇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 시장까지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엔젤로보틱스는 이미 로봇을 여러 기능 별로 나눠 모듈화하는 작업을 끝냈다. 환자 특성에 맞춰 모듈을 조합해 맞춤형 재활 로봇을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공 대표는 “치료·보조장비를 모두 갖춰 재활 치료와 관련된 시장을 석권하고, 관련 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