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일본 오츠카 제약과 미국 클릭 테라퓨틱스가 공동 개발한 앱(app, 응용프로그램) ‘리조인(Rejoyn)’이 첫 우울증 디지털 치료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받았다. 디지털 치료제는 질병을 치료하고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리조인은 화면에 나타나는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추측하는 인지기능 훈련과 사물을 잡는 방법을 수정함에 따라 증상을 개선시키는 인지행동요법을 조합했다.
최근 국내 의료진과 스타트업들이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실제 병원에서 이뤄지는 치료법을 구현한 정신질환 디지털 치료제들을 속속 개발했다. 지금까지 AI는 주로 질환을 조기 진단하거나 고위험군을 예측했지만, 이제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다. 디지털 치료제에 AI가 더해지면서 환자 맞춤형 심리상담과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울증 환자용 AI 앱, 맞춤형 치료법 제시
한규만 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최기홍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디지털 치료제 업체인 로완(Rowan)은 우울증 치료용 AI 앱인 ‘비액트’를 개발했다. 비액트가 내장된 스마트워치는 환자의 걸음 수와 이동 거리 같은 활동량과 심박변이도, 수면데이터를 실시간 측정한다. 환자는 스마트워치에 자신의 감정을 매일 입력한다. 이렇게 데이터가 일주일 정도 쌓이면 AI가 환자의 우울 증상을 진단한다.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 환자에게 행동 활성화 치료를 한다. 우울증으로 신체 의욕이 떨어졌을 때 운동이나 산책처럼 몸을 많이 움직이는 행동을 통해 의욕을 되살리는 방법이다. 비액트는 이를 앱으로 구현했다. AI는 환자의 우울 증상에 맞춰 우울감을 억제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어떤 사용자는 유산소운동이 필요하다고 추천하고 다른 사용자에게는 사람들을 만나라고 권하는 식이다.
고대안암병원은 비액트 임상시험을 시작하기 위해 환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한 교수는 “아직 임상시험 전이지만, 비액트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실제로 옆에서 의사가 조언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며 “의사가 진료실에서 길게 하지 못하는 심리 치료까지 AI 앱으로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디지털 치료제는 주로 스마트폰 앱이나 게임, 가상현실(VR), 챗봇 형태로 개발된다. 사용자의 행동을 교정하는 효과가 커 우울증이나 불면증, 불안장애 같은 정신과 질환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다. VR을 이용한 세계 첫 디지털 치료제도 1997년 미국 조지아 공대 연구진이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버츄얼 베트남(Virtual Vietnam)이었다. 심리치료에서 효과를 보지 못한 환자가 베트남 전투 현장을 구현한 VR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AI로 녹음을 실제 듣는 목소리로 바꿔
디지털 치료제 개발업체인 하이(Haii)는 범불안장애 AI 디지털 치료제인 ‘엥자이렉스’를 개발했다. 범불안장애는 어떤 사건이나 미래에 대해 과도하고 비이성적으로 걱정하는 질환이다. 엥자이렉스는 수용전념치료를 이용한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사고를 반복해 ‘마음 근육’을 단단히 만드는 과정이다.
하이 연구진은 환자가 ‘나는 할 수 있다’처럼 자존감과 자기 확신을 키우는 문장을 읽고 녹음하도록 했다. 나중에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뜨고 마음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듣는 목소리가 녹음 목소리와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내가 말할 때 들리는 목소리는 주로 두개골을 통해 전해지지만, 녹음된 목소리는 공기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AI 기술을 활용해 녹음된 목소리를 내가 직접 듣는 목소리와 가깝게 구현했다. 덕분에 녹음을 들어도 나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바로 옆에서 격려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이는 강남세브란스병원과 함께 앵자이렉스를 임상시험하고 있다. 올해 7월 중순 임상시험을 마치고 하반기 식약처에 품목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하이 관계자는 “현재까지 임상시험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최종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맞춤 상담 AI, 치료용 게임 AI도 개발
포티파이는 AI를 이용해 개인 맞춤 심리상담이 가능한 앱인 ‘마인들링’을 개발했다. 현재 약 3만명이 유료로 가입했으며, 16만명 넘게 이 앱을 사용하고 있다. 포티파이는 심리상담에서 활용하는 치료방법을 5분, 10분 단위로 1000개를 만들어 마인들링에 넣었다. AI는 마인들링 사용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면서 그에 맞는 치료방법을 제시한다.
문우리 포티파이 대표는 “서울대병원과 마인들링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우울감이 35%, 스트레스가 30% 줄어드는 효과를 확인했다”며 “이는 기존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개발된 정신질환 치료 AI는 대부분 우울증과 불안장애 치료에 쓰인다. 그만큼 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한규만 고대안암병원 교수는 “다른 정신과 질환보다 유병률(인구 대비 병이 발생한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며 “우울증만 해도 평생 유병률이 16%로, 6명 중 1명은 평생에 한 번 우울증에 걸린다”고 말했다.
AI 디지털 치료제는 다른 정신질환으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모티브는 모바일 게임으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치료하는 AI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했다. ADHD 환자는 주로 소아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임을 하면서 집중력을 강화할 수 있다.
스타러커스는 사용자가 게임 속에서 운전하면서 여러 장애물을 피하거나 임무를 완수하는 게임이다. 임무들은 실제로 정신과에서 ADHD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하는 다양한 인지 치료, 강화 과제들을 활용했다. 민정상 이모티브 대표는 “사용자마다 게임에 대한 반응 속도나 시간, 에러가 달라 AI로 실시간 분석해 개인 맞춤형 최적화된 게임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모티브는 서울대병원, 한양대병원과 함께 스타러커스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 시장 급성장, 환자 거부감 줄여야
디지털 치료제는 기존 의약품보다 개발 기간이 짧고 부작용이 적다. 기존 의약품의 효과를 보조하거나 강화해 환자의 치료를 돕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 덕분에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2022년 국가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서 발행한 ‘디지털 치료제 산업 동향 및 전망’에 따르면 디지털 치료제의 세계 시장은 2021년 32억 3000만달러(4조 4606억원) 규모였다. 이후 연평균성장률(CAGR) 20.5%에 이르는 높은 성장세를 보여 2030년에는 173억 4000만달러(약 23조 9465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디지털 치료제의 임상 건수도 2017년 4건에서 2021년 33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금까지 식약처가 허가한 디지털 치료제는 에임메드의 ‘솜즈’, 웰트의 ‘웰트아이’, 뉴냅스의 ‘비비드 브레인’, 쉐어앤서비스의 ‘이지브리드’ 등 4가지다. 솜즈와 웰트아이는 환자가 스마트기기에 기록하는 수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춤형 취침 시간을 제공하는 앱이다. 비비드 브레인은 뇌질환 환자에게 VR 기기로 시각 훈련을 통해 시야를 개선한다. 이지브리드는 폐질환 완자에게 맞춤형 유산소운동을 처방해주는 재활치료 앱이다.
아직 AI를 적용한 디지털 치료제가 승인된 적은 없다. 전문가들은 AI가 실생활에 널리 사용되는 만큼 AI 디지털 치료제도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진우 하이 대표(연세대 인지과학협동과정 교수)는 “미래 정신과 질환 치료는 디지털 헬스 쪽으로 갈 것이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며 “기술 발전과 함께, 일반 사람들이 디지털 치료 기술에 대한 접근성과 수용성을 높이는 방안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