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영국 런던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 밖에서 정부와 임금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NHS 의료진들이 파업을 벌이는 가운데 간호사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의대 정원을 늘려 왔지만, 이들 국가 중에서 한국처럼 모든 의사들이 집단 행동에 나서는 의료대란은 없었다. 의사 부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됐고, 의사가 늘어나면 기존 의사들의 고된 근무환경이 나아질 것이라는 정부의 말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 단일 체계인 한국과 달리 이들 국가는 복수의 사회 의료 보험을 두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의료진 부족 사태를 겪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각국도 의대 정원을 늘리는 추세다. 영국 정부는 의대생 증원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영국 인구는 6708만명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영국은 2020년 의대 42곳에서 의대생 8639명을 뽑았다.

영국 보건부(NHS)는 지난해 6월 오는 2031년까지 의대 정원을 1만5000명까지 두 배로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당시 전공의들은 “급여와 근무 환경 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의대 증원은 의미 없다”고 파업을 제기했지만, 나머지 의사노동조합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독일 정부는 지난 2015년 이후 의대 정원을 매년 0.7∼2.2%씩 늘려왔다. 독일 인구는 8300만 명으로 한국보다 1.6배 많지만 의대 정원은 4.9배 많다. 독일 의대 정원은 현재 1만5000명을 웃돈다. 독일의 공립 의과대학의 총정원이 9000명을 넘지만, 독일 정부는 이를 점진적으로 1만5000명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토마스 슈테펜 독일 연방보건부 차관은 이기일 복지부 차관·한국 기자단과의 면담에서 “독일의 의대 정원 또한 충분치 않아 연내 5000명 이상을 증원하려고 한다”는 계획을 밝히며 “독일에는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의사가 없다”고 전했다.

이 밖에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등도 의대 정원을 늘리고 있다. 프랑스는 의대 정원을 수십 년간 동결했다가 2021년 풀었다. 일본의 의대 정원은 현재 9403명이다. 일본은 지난 10년간 의대 정원을 확대해 4만3000명가량 늘렸지만 의사 단체의 반발은 없었다는 것이 지난달 복지부와 면담한 일본 후생노동성과 의사협회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과를 두고 단순히 한국의 의사가 ‘이기적이다’라고 말하기는 어폐가 있다. 한국과 일본, 유럽의 의료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단일 보험체계를 두고, 민간에 있는 의사단체와 정부가 직접 협상하는 구조다. 프랑스와 독일은 의사단체가 의사노조와 의사보험단체로 구분돼 의사 처우와 의사 급여는 따로 협상한다.

의사와 정부가 직접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회보험이 각기 다르게 협상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의사가 미국 등 해외 교류가 활발한 것도 다른 점이다. 영국은 의사 대부분이 정부 소속, 즉 공무원 신분으로 일주일 평균 근무 시간도 40시간 정도 일한다. 한국의 전공의는 주 80시간을 근무한다. 영국은 미국 등으로 의사 인력 해외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코로나19 때 영국 전공의들은 매년 8~9차례 파업을 했다.

한국은 미국과도 사정이 다르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의대 입학 정원을 38% 늘렸다. 미국에서 매년 배출되는 의대 졸업생은 4만5000명이다. 그러나 미국은 의대 졸업생이 진료 의사가 되기가 어렵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은 의대졸업생 숫자보다 전공의를 뽑는 비중이 현저히 적다.

미국 의학협회(AMA)에 따르면 미국의 개원의 비율은 지난 2016년 56%에서 2022년 47%로 감소하는 추세다. 그러다보니 미국 의사협회는 의사 수가 부족하다면서 전공의를 늘려 달라고 정부에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의료비나 의사 처우가 하락할 것이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한국 의료는 영리화가 아니라 상업화된 상태인 것이 문제”라며 “건보를 통해 비용 통제를 받다보니 의사 단체가 정부와 협상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의사와 정부간에 갈등만 커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이런 불합리를 인정하고, 이제는 정부 주도의 의료개혁이 아니라, 시장 중심의 의료개혁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