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파업이 시작된 19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에서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유병훈 기자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안은 이른 아침부터 평소와 똑같이 외래·입원 예약을 위해 대기 중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들은 전공의 파업이 행여 전체로 확대돼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를 포함해 일부 진료과목 전공의들은 오전 일찍 사직서를 제출하고 동시에 근무를 멈췄다. 세브란스병원은 전공의 숫자가 612명으로 서울대병원의 740명 다음으로 많다. 전체 의사 중 전공의 비율이 40.2%에 이르는 숫자다.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장도 이날 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주취자와 폭언, 폭행이 난무했던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도 이제 끝”이라며 “애초에 응급실은 문제가 많았고 동료들이 언제든 병원을 박차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 따윈 무시한 엉망진창인 정책 덕분에 소아응급의학과 세부 전문의의 꿈, 미련 없이 접을 수 있게 됐고, 돌아갈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이자 소아청소년과 의국장인 김혜민 씨(전공의 4년 차)도 17일 입장문을 통해 사직서 제출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아파도 병가는 꿈도 못 꾸고, 수액 달고 폴대 끌며 근무해왔다”면서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포기하고 피부미용 일반의를 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빅(Big)5′ 병원을 포함해 전국 주요 병원 전공의들이 사직서 제출이 확산하면서 환자와 환자 가족의 걱정도 깊어지고 있다. 각 병원 전공의들은 19일까지 사직서를 전원 제출하고 다음날인 20일 오전 6시부터는 근무하지 않겠다고 예고했다.

환자들은 직접 자신을 담당하던 전공의들이 떠날 움직임을 보이자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날 오전 세브란스 암병원에서 만난 직장인 이모(36)씨는 “아버지가 위암 환자인데, 배정받은 의사가 전공의(인턴)여서 당장 내일모레로 예정됐던 항암 치료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 회사에 반차를 내고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병원에서는 치료가 연기될 경우 따로 통보를 하겠다고 했는데, 환자나 가족 입장에서는 치료가 밀리면서 아버지 병세가 심각해질까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이 가득 차 이날 오전부터 추가 접수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병원 측은 “전공의 파업과 무방하다”며 평소에도 환자가 몰릴 경우 신규 환자 접수를 추가로 받지 않았고, 응급실은 정상적으로 운영됐다”고 밝혔다.

병원은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병원 인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전공의들의 공백을 채우기엔 시간과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병원 측은 이날 수술실 운영과 관련해 긴급 공지를 올렸다. 수술에 필수적인 마취통증의학과도 가용 인원이 평소 대비 약 50%미만이라 수술 일정이 대거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브란스병원 한 관계자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수술 등 스케줄을 다시 짜느라 바쁜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병원 관계자는 “전공의 집단 사직에 대비해 현재 수술실을 평상시의 50∼60%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외래 진료가 취소되거나 병원 침상을 줄이는 일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까지는 세브란스병원 어린이병동에서는 전공의의 업무 중단에 따른 큰 여파는 감지되지는 않았다. 20개월 아기가 폐렴에 걸려 어린이병원을 방문했다는 한 부모는 “아직까지 의료진 파업이 체감은 안된다”면서도 “아기가 빨리 안 나으면 다음 외래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그때 차질이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원무과 앞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 /조연우 기자

전공의들이 많이 근무하는 서울 시내 다른 대형병원 곳곳에선 이날 ‘의료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빅5 병원 전공의 수는 2745명으로, 5곳 병원 전체 의사인력 7042명의 39%를 차지한다. 각 병원의 전체 의사 인력 중 전공의 비율은 서울대병원이 46.2%, 세브란스병원 40.2%, 삼성서울병원 38%, 서울아산병원 34.5%, 서울성모병원 33.8%다.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전공의들도 20일부터 근무 중단에 들어가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이 병원에서 1년째 외래 진료와 입원 치료를 번갈아가며 받고 있다는 심장질환 환자 김모(62)씨는 “전공의 파업 소식에 일정을 앞당겨 온 환자들까지 겹쳐서 더 어수선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심장질환은 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텐데, 대형 병원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하면 환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최근 유방암 2기를 진단받고 3월 첫째주에 수술을 앞둔 50대 정모씨는 “가장 빠른 날로 예약을 잡았는데도 한달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데, 수술 예약이 더 미뤄지면 어떡하냐”고 우려했다. 두 자녀를 데리고 소아청소년센터를 찾은 임모(34)씨는 “아이들이 위급한 상황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잘못되면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이냐”면서 “이미 다른 대학 병원에서는 수술이 갑작스레 취소되고 있어 걱정스럽다”고 토로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사직서를 제출하는 전공의 규모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병원 관계자는 “다른 대학병원과 달리 아직 수술 일정 취소나 연기 등에 대한 변경 사항은 없다”면서도 “근무를 중단하는 전공의에 대해 공식 접수된 내용이 아직 없어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앞. /허지윤 기자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은 19일 오전부터 전공의들이 정상 근무하고 있지만 20일 아침부터 전공의들이 근무 중단을 예고했다.

일각에서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펠로우)들이 단체 행동에 나설 것이란 우려도 있으나, 아직까지 전임의 단체행동 움직임은 없다는 게 이곳에서 만난 복수의 의료진의 얘기다.

의료 현장에서는 전공의들이 한꺼번에 근무를 중단하면 여파가 클 수 밖에 없다. 한 의료진은 “병원과 진료과목별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의료진은 “(19일 오후 2시 현재까지는) 실제 파업 확대 시 병원 차원의 대응책이나 지침이 나오지 않았다”며 “환자와 보호자들의 피해가 가장 우려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수련병원 221곳에 근무하는 인턴과 레지던트 등 전공의는 1만3000여명에 이른다. 복지부는 전국 221개 전체 수련병원의 전공의를 대상으로 ‘진료유지명령’을 발령했다. 또 집단행동에 들어가면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하고 비대면진료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