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코-마리-투스병은 1886년 처음으로 이 병을 설명한 의사 3명의 이름을 딴 유전성 신경질환이다. 왼쪽부터 프랑스의 장-마틴 샤르코와 피에르 마리, 영국의 하워드 헨리 투스./위키미디어

샤르코-마리-투스. 순정만화의 주인공 이름 같은 단어가 최근 제약업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종근당은 지난 6일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와 샤르코-마리-투스 병(CMT) 치료후보물질인 ‘CKD-510′을 기술이전하는 1조 7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은 최종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바로 입금되는 계약금만 1061억원이나 돼 주목을 받았다. 노바티스가 그만큼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다.

샤르코-마리-투스 병은 1886년 처음 이 질병을 설명한 의사인 프랑스의 장-마틴 샤르코와 피에르 마리, 영국의 하워드 헨리 투스의 이름을 딴 신경질환이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손과 발의 근육이 점점 위축돼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 10만명 당 19명에서 발병하는 희소질환(공식명 희귀질환)인데, 근본 치료제는 없는 상태다.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에디터

희소질환 치료제인 희귀의약품은 과거 환자 수가 적어 경제성이 없다고 제약사들이 꺼렸다. ‘고아 약(orphan drug)’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시장진입 장벽을 낮추고 경제적 유인책까지 제공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제약산업 컨설팅업체인 이벨류에이트파마는 지난 2월 전 세계 희귀의약품 시장규모가 2018년 이후 연평균 11.6%씩 성장해 2028년에 3000억달러(한화 389조8500억원)로 성장한다고 예측했다. 그때가 되면 처방의약품 다섯 개 중 1개는 희귀의약품이 된다는 것이다.

버림받았던 약이 이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하고 있다. 희귀의약품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개발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바이오협회 자료에 따르면 희귀의약품은 임상 1상 시험부터 허가 승인까지 성공률이 17%로, 비희귀의약품(5.9%)의 3배나 됐다. 임상시험 비용도 2억4200만달러로, 4억8900만달러인 다른 신약의 절반 수준이었다. 다른 치료제가 없다면 임상 3상 시험도 생략할 수 있다.

특히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된 뒤 같은 원리로 환자가 더 많은 질병의 치료제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노바티스가 가져간 종근당의 후보물질도 심장질환 치료제로도 개발하고 있었다. CKD 501은 히스톤탈아세틸화효소6(HDAC6) 억제제이다. HDAC6은 세포에서 물질이 수송되는 통로인 미세소관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이로 인해 샤르코-마리-투스 병뿐 아니라 심장질환도 유발된다.

그래픽=정서희

종근당은 그동안 영업력은 국내 최고지만 신약개발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HDAC6 억제제를 다양한 질병 치료제로 동시에 개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뇌에 있는 이 효소를 억제해 또 다른 유전성 뇌 희소질환인 헌팅턴병을 치료하고, 말초신경에서는 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여러 신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인 이른바 플랫폼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다른 국내 제약·바이오업체들도 희귀의약품으로 선진국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2022년까지 10년 동안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63개 약품에 대해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역사가 120년이 넘는 한국 제약산업에서 미 FDA 승인을 받은 신약이 7개에 불과한 것과 비교된다. 한국이 노릴 수 있는 틈새시장인 셈이다.

희귀의약품은 틈새라고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나중에 거대한 시장을 열 수도 있다. 녹십자가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헌팅턴병 치료제인 헌터라제는 국내 환자가 200명대에 불과하지만, 미국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고 세계 시장에 진출하면서 올해 매출이 10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중국 시판 허가도 뚫었다.

종근당의 샤르코-마리-투스병 치료제와 대웅제약의 특발성 페섬유증 치료제, 한미약품의 비알코올성지방간염 치료제도 미국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은 대표적인 국산 희귀의약품이다. 바이오업체들도 적극적이다. 툴젠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라는 효소복합체로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돌연변이를 교정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회사도 샤르코-마리-투스병에 대한 유전자가위 치료제를 개발해 미 FDA 희귀의약품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희소질환은 전 세계에서 7000가지가 있는데 치료가 가능한 것은 5%에 그친다. 또 매년 새로운 희귀질환 250가지가 의학저널에 보고된다. 그만큼 시장 가능성이 큰 것이다. 개별 질환은 환자 수가 적다고 하지만, 모두 합치면 전 세계 환자가 4억명에 이른다. 진단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환자는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쉽게도 정부 지원은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희귀의약품에 지정되면 7년간 독점권을 주고, 유럽과 일본은 10년 독점권을 부여한다. 반면 한국은 4년 독점권에 그친다. 미국과 유럽은 희귀의약품을 개발하면 연구개발(R&D)에 들어간 비용의 50%에 대해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임상개발 보조금도 제공하지만, 한국은 그런 세제 혜택이 없다. 정부가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 클러스터(바이오산업 집적지)만 바라볼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자라는 새로운 성장동력도 살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