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여성 중 1.4%는 실제보다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해 음식을 거부하는 정신질환인 신경성 식욕부진증을 앓고 있다. 바비 인형과 같은 몸이 아니라고 자신을 학대해 합병증은 물론 자살까지 유발하지만 별다른 치료제가 없는 실정이다.
버섯의 환각 성분이 거식증(拒食症, Anorexia Nervosa)을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가짜약과 대조한 임상시험 결과는 아니지만, 앞으로 임상시험을 계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기존 약이 듣지 않는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도 버섯의 환각 성분으로 치료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행복호르몬과 작용하는 마법버섯 성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의대의 스테파니 펙(Stephanie Peck) 교수 연구진은 25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합성 환각제 실로시빈(psilocybin)을 1회 투여한 결과 신경성 식욕부진 환자의 상태가 크게 호전됐으며, 안전성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섭식 장애의 하나로, 식욕이 정상이거나 오히려 증가된 상태에서 마르고 싶다는 끝없는 욕구, 또는 살찌는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인해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질환이다. 보통 거식증이라고 한다. 거식증 환자는 체중이 과도하게 빠져 다른 합병증이나 자살로 사망할 위험이 크지만, 아직 승인된 치료제는 없다.
연구진은 앞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치료에 쓰인 마법버섯의 성분인 실로시빈이 거식증에도 효과가 있을지 알아보는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마법버섯은 예로부터 시베리아 유목민들로부터 남아메리카 마야 부족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식이나 질병 치료에 쓰였다. 실로시빈은 강력한 합성 마약인 LSD(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와 비슷한 환각작용을 유발한다. 몸 안에서 실로신으로 바뀌면서 행복감을 유발하는 세로토닌(serotonin) 호르몬과 작용해 환각작용을 일으킨다.
UCSD 연구진은 신경성 식욕부진증을 앓고 있는 여성 10명에게 영국 콤파스 패스웨이(COMPASS Pathways)가 만든 합성 실리시빈 25㎎을 투여했다. 실험 전후에 참가자들은 섭식 장애 정도를 0~6점으로 측정하는 검사를 받았다.
시험 결과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한달 후 체중과 체형에 대한 고민이 평균적으로 각각 24%, 34% 개선됐다. 음식과 식사에 대한 불안과 강박관념도 크게 감소했다. 또 참가자의 90%는 치료 3개월 후 자신의 삶에 대해 더 낙관적으로 느꼈다고 답했으며, 70%는 전반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했다. 3개월 추적 관찰 결과 4명은 완치 판정을 받을 정도가 됐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가짜약과 대조 시험에서 약효 확인해야
이번 시험은 약물의 안전성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어서 가짜약을 투여한 대조군은 없었다. 단순히 약물을 투여받았다는 것만으로 나타나는 위약(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어 약효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번 결과가 지난달 22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환각제 관련 학회에서 발표된 두 건의 임상시험 예비 결과와 일치해 신빙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21~65세 여성 20명에게 한 달 동안 실로시빈을 세 번 투여했다. 이들은 최소 3년 이상 거식증 진단을 받았다. 처음은 1㎎, 2~3회는 각각 25㎎을 투여한 결과 3개월 추적 결과 섭식 장애 점수가 평균적으로 임상시험 전보다 45% 가까이 낮아졌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진도 거식증 환자 18명에게 실로시빈을 투여해 상당한 개선 효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독일 드레스덴 공대 의학과의 스테파니 에를리히(Stefan Ehrlich) 교수는 이날 같은 저널에 실린 논평 논문에서 “실로시빈은 최근 우울증과 강박 장애 같은 정신 질환 치료제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그 결과도 유망하다”며 “이번 연구에서 실로시빈 치료가 경증에서 중등도의 거식증 환자가 다른 문제 없이 섭식 장애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실로시빈의 치료 효과가 최종 확인되려면 가짜약과 대조하는 임상시험이 필수적이다.. 에를리히 교수는 “앞으로 무작위 대조 시험을 통해 약효를 명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며 “심리 치료를 병행하면 거식증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급성 약물 효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거식증 때문에 통통한 바비 인형 나오기도
거식증은 한창 자라야 할 청소년기에 음식을 거부하도록 해 사회적 문제가 됐다. 과학자들은 아이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뚱뚱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로 바비 인형을 꼽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바비 인형이 여자아이의 가족과도 같다. 3~10세 여자아이들이 평균 8개의 바비 인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호주 플린더스대 심리학과의 칼리 라이스 교수는 지난 2016년 논문에서 “여자 아이들이 바비 인형 때문에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5~8세 여자아이 160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 첫째 그룹은 바비 인형이 나오는 그림책, 둘째는 정상 체형의 인형 에미가 나오는 그림책, 셋째 그룹은 인형 없는 그림책을 각각 읽혔다. 이후 자신의 몸매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보자 바비 인형을 본 아이들이 가장 낮게 나왔다.
바비 인형의 몸매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된다. 호주 과학자들은 바비 인형과 같은 체형을 가진 여성은 10만명 중 한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특히 핀란드 헬싱키 대학병원 연구진은 바비 인형과 같은 몸매를 가진 여성은 생리를 하는 데 필요한 지방이 17~22%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비판이 이어지자 최근 통통한 체형의 바비 인형이 나오기도 했다.
◇우울증, 알코올 중독 치료에서도 효과 확인
마법버섯의 실로시빈 성분은 이미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등 여러 정신 질환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뉴 잉글렌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 콤파스 패스웨이와 함께 기존 약이 듣지 않는 우울증 환자 223명에게 심리치료와 함께 합성 실로시빈을 투여한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에 의하면 25㎎의 실로시빈을 투여받은 환자는 3주 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우울증 완화 효과를 보였다. 25㎎ 투여군의 29.1%는 표준화된 우울증 척도에서 ‘완화’를 달성했다.
미국 뉴욕대 연구진은 지난해 9월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실로시빈이 알코올 중독 치료에도 효과가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25~65세 알코올 중독 환자 93명 중 48명에게 실로시빈을 투여하고 나머지 45명은 대조군으로 가짜약을 줬다. 실험 결과 대량 음주하는 날의 비율은 대조군에서 51% 감소했지만, 실로시빈 투여군에선 83%나 감소했다. 또 1회 투여 8개월 뒤 조사에선 대조군에선 24%가 단주에 성공했지만, 실험군에서 48%가 단주에 성공한 것으로 보고됐다.
호주 식품의약품안전청(TGA)은 이번 달부터 정신과 의사 처방을 받으면 기존 항우울제가 듣지 않는 치료 저항성 우울증에 실로시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하지만 아직 약효가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실제로 개인이 마법버섯을 복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전문가들은 마법버섯은 그 자체로 중독성과 위험성이 크지는 않으나, 더 강한 마약으로 넘어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 함부로 복용해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국내에서는 마법버섯 유통, 소지, 사용 시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해 10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10대 청소년이 환각버섯 포자를 길러 판매했다가 적발됐다.
참고자료
Nature Medicine(2023). https://doi.org/10.1038/s41591-023-02455-9
JAMA Psychiatry(2022), DOI: https://doi.org/10.1001/jamapsychiatry.2022.2096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2022), DOI: https://doi.org/10.1056/NEJMoa2206443
Body Image(2016), DOI: https://doi.org/10.1016/j.bodyim.2016.09.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