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근대 해부학 교육은 1885년 제중원 의학당에서 처음 시작됐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0년대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을 통해 서양식 의료 도입을 고민해 왔다. 제중원은 당시 전통 의학이 외과 질환 치료나 전염병에 한계를 보인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양의학 도입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중원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때문이다. 국내서 배출한 첫 양의(洋醫)는 1902년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의학교 1회 졸업생 19명이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자생적인 해부학 교육과 연구의 명맥은 사실상 끊기고 일본의 의학 시스템에 흡수됐다.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던 국내 해부학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위기를 맞는다. 학교를 점령했던 일본인이 모두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해부학을 가르칠 교원이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국내서 해부학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는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전국 의대를 순회하며 강의를 강행했다.
이 같은 국내 해부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16일부터 11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올해 77주년을 맞은 서울의대 해부학교실과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됐다.
김학재 의학박물관장(방사선종양학과 교수)과 신동훈 특별전 준비위원장(해부학교실 교수)은 "국내 해부학 교육과 연구를 이끌어 온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의 77년간 역사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며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해부학의 희귀자료를 공개하는 특별한 전시인 만큼 많은 분의 관심을 바란다"고 강조했다.
◇국내 첫 양의 배출 서울대 의대…한 세기 반 이어진 해부학 역사 이어간다
해부학은 인체를 포함한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단순 체내 구조물 이름을 외우는 학문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체내 구조와 기능 관계를 이해하고 임상 진료 현장에서 환자 상태를 파악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환자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질병 원인 파악부터 치료법 연구, 신약 개발까지 할 수 있는 의과학자 '양성소'인 셈이다.
해부학교실 교수들이 해부학을 의과대의 '정체성'과 같은 기초과학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생화학, 약리학은 자연대, 약대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해부학은 의대에만 존재하는 교육과정이다. 18세기 이후 해부학은 과학과 의학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현미경이 연구에 활용되면서 해부학은 세포 단위까지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서울대병원은 이번 전시를 마련한 배경에 대해 국내 근현대의료사에서 국가중앙병원 역할을 수행해 왔던 만큼 제중원의 역사적 경험과 정신적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섰다고 설명했다.
초창기 국내 해부학은 인재 부족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같은 주변국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 가운데서도 교육 과정에서 소통이 큰 문제였다. 1만개가 넘는 해부학용어는 과거 독일어, 일본어로 쓰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글, 영어, 라틴어까지 더해지며 5개 이상 언어가 혼재됐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인 만큼 의사와 학생 간 의사소통에서 한계를 경험했다.
하지만 초기 해부학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등사용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등사기로 찍어낸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실습용 표본도 새로 만들며 한 명이라도 더 교육하기 위해 매진했다. 여러 언어가 혼재된 해부학 교재를 한글로 풀어내 국내 해부학 교육과 연구의 기틀을 점차 완성해 나갔다. 이는 1990년 출판한 '해부학용어 3판'으로 결실을 맺었다. 1만 3000개에 달하는 해부학용어 중 80%를 한글로 고친 결과물이었다.
국내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 탄생은 1884년 갑신정변 때 의료 선교사 알렌이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치료한 일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몸을 열고 꿰매는 외과수술은 조선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 최초의 해부학 교과서는 1906년 발행됐다. 일본인 해부학자의 '실용해부학'을 제중원 의학생 김필순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이전에도 번역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원고를 분실하거나, 불에 타 없어져 발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대 정체성 '해부학'…진단부터 치료법·신약 개발까지 의과학자 양성소
해부학은 의학의 기본으로, 질환 원인과 치료법 이해를 위한 필수 요소다. 주로 생명체 구조와 기능을 연구한다. 인간과 다양한 동물의 기관, 조직, 세포를 보며 상호 작용과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해부학 연구자는 대부분 의학을 전공한 의사과학자들인 경우가 많다. 의사과학자는 의학과 임상 지식을 기반으로 질환과 관련된 기전 연구, 치료제 개발 연구를 한다. 질병 치료만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와 달리, 질병 원인을 밝혀내고 원인을 근거로 하는 치료법 연구는 물론, 신약 개발까지 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에서는 전통 해부학 연구, 미라 이용한 고병리학 연구, 종양학, 면역학에서부터 유전체학까지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의대 졸업 이후 주류인 진료 의사를 택하지 않고, 교육과 연구로 진로를 변경하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진료 의사에서 의사과학자로 전향한 교수들도 여럿 있다. 특정 과에 묶여 있지 않아 어느 연구 분야에도 스스럼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