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고(故) 임성기 회장 별세 이후 이어져 온 한미그룹 경영권 분쟁이 새 국면을 맞았다.
최대 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임주현 부회장 모녀, 사모펀드 라데팡스파트너스가 함께 구축한 '4자 연합'에 균열 조짐이 나타난 가운데, 경영권 분쟁 구도에서 '캐스팅보트'로 평가돼 온 차남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가 보유 지분 일부를 모녀 측 우호 투자자에게 넘기면서다.
이번 지분 이동으로 창업주 일가의 우호 지분이 신동국 회장 측을 앞서는 구도가 형성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선 신동국 회장과 모녀 간 갈등과 향후 '표 대결'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신동국 회장은 임성기 회장의 고향 후배로, 2020년 창업주 별세 이후 오너 일가의 상속세 재원 마련 과정에서 지분을 대거 확보하며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2024년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형제 측과 손잡았다가 다시 모녀·라데팡스와 '4자 연합'을 결성하며 한미그룹 경영권 구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모녀 측 우호 지분 이동"…지배구조 변수 확대
지주사 한미사이언스(008930)는 지난 2일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가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5.09%) 중 2.5%(170만9788주)를 장외 매각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업계에 따르면 사모펀드 나우IB캐피탈이 '나우아이비22호 펀드'를 활용해 해당 지분을 매입한다. 거래대금은 주당 4만8000원, 총 820억6982만원 규모다. 매수자 측은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측 우호 세력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업계에선 한때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자금을 조달해 임종훈 대표 지분 인수를 타진하는 등 지배력 확대 방안을 검토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실제 지난 2월 신 회장이 한미그룹 장남 임종윤 회장의 한미사이언스 개인 지분과 관련 법인 지분을 전량 매입하면서 신 회장이 지분을 확대하기도 했다.
임종훈 대표와 신 회장 간 지분 거래는 실제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임 대표가 이를 가족(모녀) 측에 넘기는 선택을 하면서, 신 회장과 창업자 일가 간 갈등이 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지분 변동을 반영하면 신동국 회장 측 우호 지분은 약 29.83%, 송 회장·임 부회장과 임 대표 가족 및 우호 지분은 약 31.05%로 평가된다. 양측 격차가 크지 않은 만큼 2~3% 수준의 지분 이동도 향후 의결권 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임 대표는 과거 형과 함께 모녀 측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모친과 누나와 함께 창업주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 대표는 별도 입장문을 통해 "아버님의 경영 철학과 제약보국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어머니 송영숙 회장, 누님 임주현 부회장과 함께 회사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600억 소송·시니어케어 무산…4자연합 갈등 키운 사건
시장에서는 신 회장의 한미약품(128940), 한미사이언스 경영 개입과 잇따른 지분 확대 행보가 4자 연합 내부 신뢰를 약화시키며 갈등을 키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다.
신 회장은 보유 지분을 담보로 교환사채(EB)를 발행하고 이후 추가로 지분을 매입했다.
이에 대해 모녀와 라데팡스 측은 주주 간 계약을 위반한 사실상의 지배력 확대 시도라고 주장하며 600억원 규모의 위약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반면 신 회장 측은 경영상 필요한 자금 조달과 투자 판단이었을 뿐 계약 위반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재판은 변론 절차를 마치고 선고를 앞둔 상태로, 결과에 따라 4자 연합의 향후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양측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는 반포 시니어케어 사업이다.
한미그룹은 서울 반포 부지를 활용해 실버타운과 병원, 헬스케어 서비스를 연계하는 시니어케어 사업을 추진했지만, 사업 추진 과정에서 신 회장 측이 투자 구조와 사업 방향에 이견을 제기하면서 계획이 중단됐다.
모녀 측은 신 회장이 기존 합의를 번복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신 회장 측은 충분한 사업성 검토 결과 추진을 철회한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 사업 무산은 현재 진행 중인 위약벌 소송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다.
◇2029년 전후 갈등 격화 가능성
현재 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 신동국 회장, 라데팡스 측이 맺은 주주 간 계약은 유지되고 있다. 이 계약에는 의결권 공동 행사와 주요 경영 의사 결정에 대한 협의 등이 담겨 있어, 당장 독자적인 의사 결정과 표 대결을 하는 구조는 아니다.
주주 간 계약은 2029년까지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공동 의결권 행사 체제가 이어지겠지만, 계약 종료 이후에는 경영권 분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임종훈 대표의 지분 매각으로 창업주 일가 중심의 우호 지분이 신 회장 측을 앞서는 구도가 형성된 만큼 향후 지배구조 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임 대표가 공개적으로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측과 함께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창업주 일가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거래는 단순한 지분 매각이 아니라 향후 경영권 구도의 방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연합 내부 역학은 달라질 수 있고, 계약 종료 이후에는 지배구조 재편 논의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