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이 대규모 구조조정과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를 동시 추진하며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2036년까지 약 4000억달러(약 597조원) 규모 의약품의 특허 만료가 예고되면서, 비용 절감과 연구개발(R&D) 효율화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빅파마들은 특허 만료에 따른 수익성 악화 가능성에 대비해 조직 슬림화와 동시에 AI 중심 연구개발 체계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다케다·노보·릴리 모두 대규모 감축…AI 전환
일본 다케다제약은 지난 15일 연간 실적 발표에서 '트랜스포메이션 프로그램(transformation program)'을 공개하고, 2026 회계연도 안에 약 45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소재 미국 본사 인력 634명 감축도 포함됐다. 회사는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 2028년까지 연간 2000억엔(한화 1조2600억원)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조직 개편은 다음 달 한국계 임원인 줄리 김(Julie Kim)의 차기 다케다 최고경영자(CEO) 취임에 맞춰 추진된다. 다케다는 인력 감축과 함께 내년까지 신약 3종 출시 등 사업 구조 재정비에도 나설 예정이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빅파마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 분석 기업 아이큐비아(IQVIA)와 미국 제약전문지인 피어스파마가 연매출 200억달러 이상 주요 제약사 17곳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은 최근 1년간 총 2만2000명 이상의 인력을 감축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이를 2030년대까지 이어질 대규모 특허 만료에 대비한 구조적 전략으로 보고 있다. 블록버스터 의약품 특허가 잇따라 종료되며 수익성 악화 가능성이 커지자, 인건비와 운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AI 활용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주요 제약사들은 감원과 함께 AI 투자 확대를 병행하고 있다.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해 9월 약 9000명 규모 감원 계획을 발표하며 연간 약 80억덴마크크로네(약 1조8538억원) 절감을 목표로 제시했다. 미국 머크(MSD)도 2027년까지 수천명 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연간 30억달러(약 4조4325억원) 비용 절감을 추진하고 있다.
스위스 로슈는 지난해까지 전 세계에서 약 1만개의 일자리를 줄였고, 노바티스도 전체 인력의 약 10%에 해당하는 8000명을 감축했다. 프랑스 사노피 역시 일반의약품 사업 지분 정리 과정에서 8000명 이상 인력을 줄였다.
이들 기업은 동시에 AI 기반 연구개발 역량 강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MSD는 구글 클라우드와 협력해 최대 10억달러를 투입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 도입에 나섰고, 노보 노디스크도 오픈AI와 전사적 AI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가장 공격적인 투자 사례로는 로슈가 꼽힌다. 로슈는 지난 3월 엔비디아와 함께 AI 슈퍼컴퓨팅 플랫폼인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AI 공장'을 출범했다. 엔비디아의 블랙웰(Blackwell) GPU 2176개를 추가 확보하면서 현재 총 3500개 이상의 GPU를 운영 중이다.
이는 복잡한 세포 구조를 분석하고 특정 표적에 결합하는 신규 분자를 발굴하기 위한 초대형 연산 인프라로, 현재까지 공개된 제약업계 하이브리드 AI 인프라 가운데 최대 규모로 평가된다.
미국 일라이 릴리도 올해 1월 엔비디아와 10억달러 규모 AI 연구소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2월에는 1000개 이상의 GPU를 기반으로 한 슈퍼컴퓨터 '릴리팟(LillyPad)' 구축 계획도 공개했다.
◇韓도 감원 우려 커지는데…AI 연구개발 역량은 아직 '걸음마'
국내 제약·바이오업계에서도 비용 절감과 조직 효율화 움직임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 인하 정책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경우 고용 불안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지난해 12월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약·바이오 기업 59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들의 전체 종사자는 3만9170명이었다. 이들 기업은 약가 개편안이 원안대로 시행될 경우 총 1691명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기존 인력 대비 9.1% 수준이다.
반면 글로벌 빅파마와는 달리, AI 기반 신약개발 역량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AI 인프라 경쟁력에서 세계 5위 수준이지만, 이를 실제 의약품 개발에 접목할 수 있는 전문 인력 경쟁력은 세계 13위에 그쳤다.
업계에서는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단순 비용 절감에 그칠 것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의 AI 기반 연구개발 체계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AI 활용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바이오 업계의 AI 도입은 문서 업무 자동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글로벌 기업들처럼 후보물질 발굴, 임상시험, 기술 검증(PoC) 등 연구개발 전반에 AI와 자동화 시스템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