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정서희

한미약품(128940)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신동국(76) 한양정밀 회장이 2000억 원대 자금을 차입해 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008930) 지분 약 30%를 확보하면서다.

신 회장 측은 "경영권 분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으나, 시장은 이를 창업자 일가 중심의 구도에서 벗어나 신 회장 독자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하고 있다. 오는 3월 열리는 핵심 사업회사 한미약품의 정기 주주총회가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 신동국 회장 '4자 연합' 균열 새 판...독자노선 구축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24일 신 회장이 지분율을 약 30%까지 확대했다고 공시했다. 모녀와 대립해 온 창업자 장남 임종윤 북경한미 동사장의 개인 회사 측과 손잡고 지분을 추가 매입했다.

업계에서는 2029년 예정된 4자 연합 계약 만료를 앞두고, 신 회장이 선제적으로 독자적인 지배 기반을 구축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기존 캐스팅보터 역할에서 벗어나 그룹 전체의 방향성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이 소식에 이날 오전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상한가를 기록했고, 종가 기준으로는 전일 대비 20.23% 올랐다. 시장에선 이를 '4자연합의 갈등 심화'와 '경영권 분쟁 재점화' 신호로 해석한 것이다.

2024년 한미약품 오너 일가 모녀와 형제 간 경영권 분쟁 당시 신 회장은 모녀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사모펀드 운용사 라데팡스파트너스 등과 '4자 연합'을 이루고 형제와의 대결에서 이겼다.

당시 신 회장과 모녀 측은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지분 매각 시 사전 협의와 우선 매수권을 보장하고, 위반 시 600억원의 위약 벌금을 물기로 한 내용이다.

그러나 지난해 7월 한양정밀이 보유 지분을 담보로 380억원 규모 교환사채를 발행하면서 계약 위반 여부를 다투고 있다. 모녀 측은 신 회장 측의 교환사채 발행을 두고 계약 위반이라며 소송과 가압류를 제기한 상태다.

한미약품 그룹 최대 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가운데)과 법률 자문을 맡은 정진수 화우 대표변호사, 이병주 일맥 대표변호사가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영 간섭 논란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허지윤 기자

다만, 신 회장은 24일 오후 연 기자 간담회에서 "경영권 분쟁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존중한다"고 일축했다. 이 영향으로 25일 오후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장중 전일 대비 8.19%까지 내렸다.

신 회장이 경영권 분쟁 재점화 가능성에 선을 그었지만, 업계와 전문가들은 다른 시각을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인은 "신 회장의 최근 행보, 4자 연합의 계약 기간 등에 비춰보면 2029년 예정인 4자 연합 간 계약 만료를 앞두고 신 회장 측이 새 판을 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 3월 주총 1차 분수령 "이사회 장악 노릴 것"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확대한 신 회장의 다음 행보는 한미약품 이사회 재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는 3월 말 열릴 예정인 한미약품 주주총회에서는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를 포함해 이사진 10명 중 4명의 임기가 만료된다. 사내 이사인 박 대표이사와 박명희 전무, 사외이사 윤영각 파빌리온자산운용 대표와 윤도흠 차의과학대학교 의무부총장 등이다.

이사회 내부 구도를 두부 모 자르듯 나누긴 어려우나 신 회장과 모녀 간 연합에 균열이 생겨 있는 현 상황 등을 고려하며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6대 4 수준으로 신 회장에 유리할 수 있는 구도이고, 한미약품 이사회는 신 회장에 다소 불리한 구도라는 게 그룹 내부 관계자들의 평가다.

현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김재교 대표이사와 사내이사 4인(임주현, 임종훈, 심병화, 김성훈), 사외이사 3인(최현만, 김영훈, 신용삼), 기타비상무이사 2인(배보경, 신동국) 등 총 10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미 신 회장은 박재현 대표이사의 연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현재 신 회장의 한미사이언스 지분 추가 매수로 신 회장 측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은 한양정밀 지분(6.95%)을 포함해 29.83%에 달한다.

한미사이언스는 한미약품 지분 약 41.42%를 보유하고 있어 한미약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한미사이언스 이사회가 '한미약품 이사회 주총 안건' 의안을 상정해 한미약품 주총에서 해당 의안이 오르고, 한미사이언스 이사회가 의결권을 행사할 지 여부를 논의하는 식이다.

이사회 의결이 없더라도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가 직권으로 한미약품에 대한 한미사이언스의 의결권 행사를 결정할 수 있다.

다만, 현재 김재교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부회장은 신동국 회장이 추천하고 4자 연합이 합의해 선임된 전문경영인이라는 점에서, 4자 연합 동의 없이 단독으로 의결권 행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평가다.

신 회장 측 보유 한미약품 주식 8.67%, 한미사이언스의 한미약품 지분 41.42%를 합치면 총 50.09%다.

한미약품 주총 안건에 대한 한미사이언스 의결권 방향이 신 회장 뜻대로 결정된다면, 신 회장 입장에선 50%에 달하는 의결권으로 한미약품 사내·사외 이사 신규 선임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내·사외 이사 선임 안건은 출석 주주 의결권의 과반수와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1 이상 동의를 얻으면 가결된다.

한미약품 내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지금 신 회장은 한미약품 그룹 모녀의 영향력을 끊고, 박 대표의 연임을 막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며 "지분을 앞세워 자신에게 우호적 이사회를 완성하고 본인의 입김이 잘 통할 새 전문경영인을 두려는 게 신 회장의 의중이라고 한미약품 출신들은 보고 있다"고 말했다.

◇ 대주주 영향력·전문경영인 독립성 충돌

업계에선 이미 대주주와 전문경영인 간 갈등 논란이 커진 만큼, 한미약품이 현 정부의 개정 상법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개정 상법 체제 아래 기업 지배구조의 방향성과 대주주 전횡을 이사회가 얼마나 견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의 주요 취지에 대해 "지배 주주가 이사회를 통해 회사의 이익을 곶감 빼 먹듯 빼먹는 것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첫걸음은 '거수기 이사회'를 '책임지는 이사회'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지주사 한미사이언스와 핵심 사업회사 한미약품은 표면적으론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신 회장의 지분과 실제 활동 등을 고려할 때 지주사는 물론 자회사에도 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라고 복수의 그룹 임직원들이 설명했다.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4자 연합의 승리로 일단락된 후 영입된 김재교 부회장과 심병화 한미사이언스 부사장(CFO)은 현재 신동국 회장의 신임 아래 그룹의 실적 개선과 조직 안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대주주의 영향력 행사와 전문경영인으로서 독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경제정책팀 국장은 "기업 경영권 분쟁의 경우 지분이 압도적으로 큰 쪽에서는 절차적 정당성만 확보하면 이사회 재편은 쉬운 상황"이라며 "다만, 갈등 관계인 대척점의 전문경영인이 경영능력 면에서 강점이 있고 내부 신임이 두터우면 이사 교체의 절차적 명분 확보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전문경영인에 대한 흠집, 노이즈를 만드는 행태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영권 분쟁이 표면화되면 오너 일가(모녀)의 백기사 여부와 국민연금의 개입 가능성이 분쟁의 향방을 가를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한미약품그룹 직원이 24일 오후 서울 송파구 한미약품 본사에서 신동국 회장의 성추행 임원 비호 발언 등에 대해 릴레이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염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