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치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희소·난치성 질환은 많다. 과학계는 줄기세포를 활용한 재생의료기술이 이러한 희소·난치성 질환을 고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줄기세포는 뼈·뇌·근육·피부·심장 등 신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로 자라는 원시세포(原始細胞)이다.
과학계는 줄기세포를 환자 몸 속에 투여하면 손상된 부위를 스스로 찾아가 손상 조직을 재생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치료법에 비해 부작용 위험도 적다. 줄기세포 치료제가 성공하면 파킨슨병과 뇌전증(간질), 당뇨병 같이 원천 치료 방법이 없는 질환에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20일 전 세계에서 재생의료용 줄기세포 임상시험이 116건 진행되고 있다며, 윤리·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이 분야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 보건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상용화된 줄기세포 치료제는 총 12개이다. 그중 4개가 한국에서 개발됐다. 한국은 최근 10년간 주춤했지만 다시 개발에 나서 예전처럼 줄기세포 치료제 강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파킨슨병·뇌전증, 손상 세포를 줄기세포로 복구
줄기세포는 크게 배아줄기(ES)세포, 유도만능줄기(iPS)세포, 성체줄기세포로 나뉜다. 배아줄기세포는 정자와 난자가 만난 지 5~6일 된 배아(수정란)에서 만들어져 나중에 모든 종류의 인체 세포로 자란다. iPS 세포는 다 자란 세포에 특정 유전자나 단백질을 넣어 발생 초기의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만든 것이다. 성체줄기세포는 말 그대로 성체에 존재하는 원시세포를 의미한다. 인체의 여러 장기나 조직에서 세포가 손상되면 그 세포로 자라 대체한다.
과학자들은 성체줄기세포를 1세대 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와 iPS세포를 2세대라고 부른다. 현재 진행 중인 줄기세포 임상시험 가운데 절반가량은 배아줄기세포, 나머지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 성체줄기세포를 활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연구는 파킨슨병에 대한 임상시험이다.
파킨슨병은 근육의 무의식적인 운동을 담당하는 도파민 신경세포가 줄어들면서 손발이 떨리고 걸음걸이가 무거워지는 퇴행성 뇌 질환이다. 과학계는 줄기세포를 도파민 세포로 분화시키고 이를 뇌에 이식하면 파킨슨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다고 본다. 파킨슨병에 대한 줄기세포 임상시험은 12건이 진행 중이다.
독일 제약사 바이엘의 자회사인 블루록 테라퓨틱스(Bluerock Therapeutics)는 지난 2022년 파킨슨병 환자 12명에게 배아줄기세포에서 유래한 도파민 세포를 이식하는 임상시험을 했다. 환자 뇌에 줄기세포 치료제를 주입하고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으로 확인한 결과, 환자들이 이식받은 세포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생성하는 것을 확인했다. 환자에서 특별한 이상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블루록은 이러한 임상 1상 시험 결과를 토대로 현재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다.
뇌전증 임상시험도 진행되고 있다. 뇌전증은 손상된 뇌세포에서 전기신호가 폭증하면서 근육 경련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미국 뉴로나 테라퓨틱스(Neurona Therapeutics)는 기존 치료 약물로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뇌전증 환자 10명에게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신경세포 사이를 연결해 정보를 전달하는 인터뉴런(Interneuron)을 배아줄기세포로 만들어 환자들의 뇌에 이식했다.
임상시험 결과 빈번한 발작으로 일상 생활이 불가능했던 환자들의 발작 빈도 수가 이식 1년 뒤 제로(0)로 줄었고, 이러한 효과가 2년 동안 유지됐다. 심각한 부작용도 보고되지 않아, 지난해 6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신속승인 절차를 진행 중이다.
◇안과질환·당뇨병은 역분화 줄기세포로 치료
시신경이 손상돼 생기는 망막 질환도 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다. 현재 황반변성을 비롯한 안구 질환에 대한 줄기세포 치료제 임상시험도 29건이 진행되고 있다.
황반변성은 안구의 안쪽에 있는 신경세포 막인 망막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황반이 노화와 염증으로 기능을 잃거나 심할 경우 실명에 이르게 하는 질환이다. 황반변성 치료에는 배아줄기세포가 아니라 iPS세포가 주로 활용된다. 다 자란 세포의 발생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역분화로 치료제를 언제 어디서든 확보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눈 앞쪽에 있는 각막도 iPS세포로 치료한다. 일본 오사카대 의대 연구진은 지난달 건강한 다른 사람의 세포로 만든 iPS세포를 이용해 처음으로 각막 손상으로 인한 시력 손실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심각한 시력 손실을 겪던 네 명의 환자 중 세 명이 줄기세포 이식 후 시력 개선 효과를 경험했으며, 그 효과는 1년 이상 지속됐다.
기존에는 환자의 건강한 눈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로 만든 각막 세포를 이식했지만, 줄기세포 추출 과정에서 눈에 손상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눈 양쪽이 손상되면 아예 불가능했다. 이번에는 건강한 기증자에서 받은 혈액세포를 원시세포인 iPS세포로 만든 다음, 다시 각막 세포로 분화시켜 흉터를 제거한 곳에 이식했다.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할 길이 열린 셈이다.
최근 당뇨병 줄기세포 치료제도 개발됐다. 중국 베이징대와 난카이대 공동 연구진은 지난 9월 25세 환자에게 줄기세포를 이식해 1년 동안 문제 없이 제1형 당뇨병에 대한 치료 효과를 입증했다. 제1형 당뇨병은면역세포가 췌장 세포를 파괴해 혈당 조절 호르몬인 인슐린을 제대로 분비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연구진은 환자의 췌도에서 추출한 세포에 화학물질을 넣어 iPS세포로 만들어 환자 복부에 이식했다. 췌도는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비하는 세포들이 섬처럼 군데군데 뭉쳐 있는 것을 말한다. 임상시험 결과 환자는 이식 75일째부터 스스로 인슐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10년간 주춤했던 한국, 최근 재가동
국내에서도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이 활발하다. 전 세계 상용화된 줄기세포 치료제 12개 가운데 4개가 국내 제품이다. 2011년 파미셀(005690)의 심근경색 치료제 ‘하티셀그램’을 시작으로, 2012년 메디포스트(078160)의 퇴행성 무릎 연골 치료제 ‘카티스템’, 안트로젠(065660)의 크론성 누공 치료제 ‘큐피스템’, 2014년 코아스템켐온(166480)의 루게릭병 치료제 ‘뉴로나타-알’이 국내 승인을 받았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임상시험을 수행하며 줄기세포 연구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다음 허가 품목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당초 아토피 치료제 임상 3상 시험 중이던 강스템바이오텍(217730)이 다섯 번째 허가 주자로 주목받았지만, 최근 1차 평가지표의 통계적 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밖에도 파미셀, 네이처셀(007390) 등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품목 허가를 신청했지만, 허가가 불발됐다.
다만 후발 주자들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기대를 저버리기엔 이르다. 에스바이오메딕스(304360)는 배아줄기세포를 활용한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지난해 5월부터 아시아 최초로 국내 파킨슨병 환자 12명을 대상으로 임상 1·2a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엔셀(456070)은 손과 발 근육이 위축되는 희소 난치성 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병 1A형 치료를 위한 차세대 중간엽 줄기세포 치료제 ‘EN001-CMT’를 개발하고 있다. 중간엽 줄기세포는 탯줄과 골수, 지방 등의 조직에서 얻는 성체줄기세포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4-04160-0
The Lancet(2024), DOI: https://doi.org/10.1016/S0140-6736(24)017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