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릭스(David Ricks) 일라이 릴리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1일 미국의 경제매체인 CNBC와 인터뷰하고 있다./CNBC

비만 치료제를 두고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와 경쟁을 펼치고 있는 미국 일라이 릴리가 업계 최초로 알코올과 니코틴 등 약물 중독 치료제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비만이 음식 중독에서 비롯되므로 다른 약물 중독도 비만약 성분으로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일라이 릴리의 비만약인 젭바운드가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보다 체중 감량 효과가 높다는 임상시험 결과가 나와 비만약 시장에서 앞서는 동시에 약물 중독 치료 분야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라이 릴리의 최고경영자(CEO)인 데이비드 릭스(David Ricks)는 지난 10일(현지 시각)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젭바운드를 비롯한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계열 약물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줄일 뿐 아니라 다른 물질에 대한 욕구도 억제할 수 있다"며 "내년부터 알코올과 니코틴, 마약성 약물 남용 치료제 개발을 위한 대규모 연구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는 현재 일라이 릴리가 개발 중인 먹는 비만약 물질인 오르포글리프론을 쓸 예정이다. 일라이 릴리는 현재 한국,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오르포글리프론의 임상 3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임상 2상을 통해 평균 최대 14.7%의 체중 감량 효과를 증명했다.

인체의 GLP-1 호르몬은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신경세포를 조절해 식사 후 식욕을 떨어뜨리고 포만감을 유발한다. 이를 흉내 낸 게 GLP-1 유사체다. 최근 과학자들은 GLP-1의 원리를 이용해 뇌 전체를 표적으로 삼으면 다른 효과도 많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 GLP-1 유사체가 마약성 약물 사용 장애 감소에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발견됐다. 위고비 또한 비만뿐 아니라 약물 중독, 알츠하이머성 치매 등 뇌 질환까지 치료 효과를 보인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미국 시카고의 로욜라대 연구진은 지난 10월 위고비와 같은 성분의 당뇨병 치료제인 오젬픽이 약물·알코올 중독을 절반 가까이 줄였다고 발표했다. 오피오이드(아편성 진통제) 사용 장애(OUD) 병력이 있는 50만3747명과 알코올 사용 장애(AUD) 병력이 있는 81만730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 오젬픽을 처방한 환자는 다른 환자보다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률이 평균 40%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피오이드는 모르핀, 헤로인, 메타돈, 펜타닐, 옥시코돈 등이 포함된 마약성 약물이다. 주로 수술 후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과다복용은 미국에서 25~54세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면서 '오피오이드 위기'라는 말까지 나왔다.미국 보건복지부(HHS)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오피오이드로 인한 사망자 수는 8만1000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마약성 약물 치료에 대한 수요가 높은 상황에서 일라이 릴리는 업계에서 가장 먼저 GLP-1 유사체 약물로 임상시험에 착수한다. 당뇨·비만약 개발은 노보 노디스크보다 1~2년 늦었지만, 약물 중독 치료 분야는 먼저 치고 나가겠다는 계획으로 풀이된다. 노보 노디스크의 오젬픽·위고비는 미국에서 각각 2017년 12월과 2021년 7월에 허가받은 반면, 일라이 릴리의 당뇨약 마운자로 허가는 2022년 5월, 같은 성분의 젭바운드는 지난해 11월 허가됐다.

두 기업의 비만약 효능 시험에서도 릴리가 판정승을 거둔 것도 이번 발표에 동력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 4일 일라이 릴리는 비만 환자 임상시험에서 젭바운드가 위고비보다 체중 감량 효과가 47% 더 컸다고 밝혔다. 두 비만 치료제를 같은 환자군에게 직접 비교한 임상시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보 노디스크 역시 약물 중독 치료 분야를 눈여겨보고 있다. 실제로 노보 노디스크는 앞서 진행한 소규모 임상시험에서 위고비의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가 오피오이드에 중독된 사람을 치료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3주 시험에서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부작용으로 중도 탈락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최근 노보 노디스크가 알코올 관련 간 질환에 대해 GLP-1 계열 약물의 임상시험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중독 치료제 개발보다는 보조적인 측정 차원에 그친다고 미국 의학전문지인 스탯(STAT)은 평가했다.

일라이 릴리가 약물 중독 치료제에서 일단 앞섰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앨리슨 샤피로(Allison Shapiro)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는 "GLP-1 유사체 비만약은 배고픔과 체온, 심박수 뿐 아니라 미각, 보상 등에도 관여하는 시상하부와 후뇌에 작용할 것"이라며 "이 덕분에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증상을 줄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작용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선두주자인 일라이 릴리에게 이 작용 원리를 밝혀야 하는 난제가 주어진 셈이다. 릭스 일라이 릴리 CEO는 "약물 중독 치료제 개발을 위해 GLP-1 계열 약물의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건 전 세계 주요 제약사 중 최초"라며 "지금까지 중독에 대한 치료법을 구체적으로 시험한 제약사가 없어 우리가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