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기어리(Stewart Geary) 일본 제약사 에자이 부사장은 지난 29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레켐비는 긍정적인 데이터로 많은 의·과학계에서 혁신 신약으로 인정받았으며, 미국·일본 등 여러 국가로부터 승인받아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기대받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기어리 부사장은 이날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에서 열린 2024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KoNECT)-보건복지부(MOHW)-식약처(MFDS) 인터내셔널 콘퍼런스(KIC)에 기조연설자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두 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레켐비 탄생
에자이는 1941년 설립한 일본의 대표 제약사로, 현재 글로벌 20대 대형 제약사로 성장했다. 에자이의 대표적인 파이프라인(신약개발과제)은 단연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다. 알츠하이머병은 전 세계 치매 환자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에자이의 첫 치매 치료제는 1996년 개발한 아리셉트(성분명 도네페질)다.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확인돼,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승인받았다. 2010년 특허 만료로 수많은 제네릭(복제약)이 나오면서 현재 도네페질 계열 약물은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80%를 차지한다.
이후 2021년 6월 에자이는 두 번째 치매 치료제인 아두헬름(아두카누맙)을 개발해 FDA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고가인 약값에 비해 치료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작용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처방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아두헬름은 결국 시장에서 퇴출됐지만, 에자이는 여기서 얻은 노하우로 다음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개발에 돌입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레켐비(레카네맙)다.
기어리 부사장은 “우리 R&D(연구개발)센터에는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를 수차례 개발하며 방대한 데이터가 쌓여 있다”며 “앞으로 알츠하이머병 치료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다는 게 강점”이라고 말했다.
레켐비는 에자이의 R&D 뚝심으로 탄생했다. 에자이는 신약 R&D에 매년 1조원 규모를 투자하고 있다. 올해 R&D 투자 규모는 약 1조5155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에자이 R&D 조직의 명칭은 ‘심층 인간 생물학 학습 센터(Deep Human Biology Learning Center)’다. 단순히 표적을 정하고 임상시험을 하는 게 아니라, 질병이 환자에게 어떻게 발생하는지,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알츠하이머병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 불확실하다. 현재까지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인 아밀로이드 베타(Aβ)와 타우가 뇌 속에 쌓여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밀로이드 베타는 원래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단백질이지만, 세포에서 떨어져 나와 덩어리를 이루면 오히려 신경세포에 손상을 준다. 타우 역시 신경세포의 구조를 유지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지만,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세포 내부에 쌓이면서 인지 기능에 문제를 일으킨다.
에자이가 미국 바이오젠과 공동 개발한 레켐비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축적을 막는 대표적인 치매 신약이다. 임상 3상 시험에서 인지 능력 감소를 27% 늦추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블록버스터급 신약으로 주목받았다. 현재 미국과 한국·일본·영국·이스라엘 등에서 경증 알츠하이머병과 경도인지장애 치료용으로 승인됐으며, 미국·일본·중국은 이미 시판을 시작했다. 한국에도 오는 12월 출시된다.
◇”안전성 우려 해소할 것…후속 신약도 연구 중”
그러나 에자이는 레켐비의 안전성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레켐비의 부작용은 뇌부종과 뇌출혈이 대표적인데, 이는 임상 3상 시험에서도 나타났다. 투약 환자 전체 13%가 뇌부종을 경험하고, 17%가 뇌출혈을 겪는 부작용이 확인됐다.
올해 7월 유럽의약품청(EMA)에 이어 지난 16일 호주 식품의약품청(TGA)이 이런 레켐비의 안전성 우려를 이유로 승인을 거절했다. 에자이·바이오젠은 현재 유럽과 호주에 재검토를 요청한 상태다. 기어리 부사장은 “레켐비는 EU(유럽연합)의 규제 기관에서 검토한 프로토콜(계획서)에 따라 임상시험이 진행됐으며, 미국 FDA와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레켐비의 데이터를 신중히 검토해 승인했다”며 “유럽과 호주 당국의 결정에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에자이의 글로벌 안전 책임자(Global Safety Officer·GSO)라는 직책도 맡고 있다. 에자이가 개발하는 모든 의약품의 개발부터 시판까지 전 과정에 걸쳐 안전을 총괄한다. 기어리 부사장은 “에자이는 레켐비의 긍정적인 데이터를 강력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두 기관에 이의를 제기했다”며 “면밀히 재검토해 우려를 해소하고, 레켐비가 많은 치매 환자들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결정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에자이는 레켐비 처방 환자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환자들의 투약 편의성을 높일 수 있는 제형으로 변경해 승인을 요청한 상태다. 기존에 승인받은 정맥 투여(IV)는 2주 간격으로 병원에서 이뤄지지만, 이번에 바꾼 피하 투여(SC) 요법은 주 1회 자가 투여하는 방식이다. 승인될 경우 투여 환자가 크게 늘 수 있다.
에자이의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 현재 타우가 쌓이는 것을 막는 신약후보물질인 E2814과 레카네맙을 병용하는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이 새로운 병용요법은 미국을 비롯해 16개국에서 경증을 비롯해 모든 단계의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다.
에자이의 또다른 파이프라인으로는 종양학 부문이 있다. 그중에서도 블록버스터 의약품인 갑상선암·간암 치료제 렌비마(렌바티닙)의 매출 비중이 가장 크다. 강력한 차세대 항암제로 떠오른 항체-약물 접합체(ADC) 항암제도 개발 중이다. ADC는 암세포와 결합하는 항체에 약물을 붙여서 정확하게 약물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암세포만 정확하게 공격하는 유도미사일 항암제와 같다.
에자이는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BMS)와 함께 폐암·난소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2상 시험을 진행했다. 지난 7월 BMS와의 협업이 종료돼, 남은 임상 개발은 에자이가 단독으로 진행한다. 기어리 부사장은 “ADC 항암 신약 물질인 파레투주맙 엑테리불린 개발은 에자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고형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업체들과도 협업 활발…“韓, 네 번째로 큰 시장”
에자이는 한국 업체들과도 다양한 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혈액 바이오마커(생체지표) 검사 전문 업체와 조기 인지 평가를 위한 디지털치료제 등 분야의 바이오 업체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시니어 헬스케어 서비스를 위해 SK텔레콤과 인공지능(AI) 기반 헬스케어 툴도 개발하고 있다.
기어리 부사장은 “한국은 일본, 미국, 중국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시장”이라며 “약품 판매뿐 아니라 한국의 임상시험 환경이 뛰어난 만큼, 에자이의 신약개발에 있어 한국은 매우 중요한 나라”라고 말했다.
기어리 부사장은 1990년대 초에 에자이에 인턴으로 합류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 화학과와 스탠퍼드대대 의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동기들은 대부분 의사가 됐지만, 기어리 부사장은 환자를 위한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업계를 택했다. 일자리를 찾던 중 에자이에서 인턴십 제안을 받아 곧바로 일본 도쿄로 향했다.
기어리 부사장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미국 FDA에 제출할 첫 번째 치매 치료제인 아리셉트의 임상 1상 시험 계획(IND)을 영문으로 작성·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대에서 학문적인 연구와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환자를 만나다가, 직접 신약개발을 하는 산업계에 와보니 엄청난 자원이 투입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며 “특히 에자이의 치매 치료제 연구를 첫 과제로 받으면서, 진로를 산업계로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