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를 통해 전파되는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가 다음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의 주범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최근 고양이·돼지·소 등 포유류로 감염 대상이 확대되고 다시 사람이 감염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사람 간 전파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거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이 대유행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4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를 주제로 열린 간담회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유행 흐름이 조류에서 포유류로 넘어와 사람이 감염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만약 바이러스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 가능한 형태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새로운 팬데믹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러스는 유행하는 계절마다 유전자 일부가 바뀌면서 나타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바이러스 유전자가 만나 전에 없던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감염력이 강한 변이로 이어진다. 코로나19도 그렇게 갈수록 독한 변이가 발생했다.
인체 감염 위험이 가장 높은 조류 인플루엔자는 A형 인플루엔자다. 이 교수는 “학계는 특히 H5N1형 바이러스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전 세계 H5N1, H7N9, H9N2 바이러스 감염 사례는 총 2595건 보고됐고 이 중 1084명이 사망했다. 고병원성인 H5N1 바이러스는 A형 인플루엔자의 변이종으로 902건의 감염 사례 중 486명이 숨졌다.
대유행에 대응하려면 신속한 백신 개발과 생산, 접종 전략이 중요하다. 이 교수는 바이러스 자체나 일부 단백질처럼 백신으로 쓸 항원을 아낄 수 있는 ‘면역 증강제’를 도입하고, 메신저 리보핵산(mRNA) 기술 등을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면역 증강제는 항원이 일으키는 면역 반응을 키우는 물질이다. 백신에 이를 함유하면 한 명 접종 분량으로 2~4명에게 투여할 수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도 이 기술을 활용해 효율적인 백신 항원 개발과 접종 효과를 내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2009년 인플루엔자 대유행 시기에 글로벌 기업들의 면역 증강제를 함유한 백신이 사용됐다”며 “당시 젊은 층이 맞았던 인플루엔자 백신은 항원량은 4분의 1 정도로 줄인 것으로, 이는 면역 증강제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재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백신은 유정란과 세포배양 백신으로 면역 증강제가 없기 때문에 이를 확보한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플랫폼인 mRNA 백신에 대한 투자와 연구도 필요하다고 했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의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만 알면 빠르게 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나더라도 기존 방식보다 백신을 더 빨리 개발할 수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예전 백신보다 훨씬 빨리 개발됐던 화이자, 모더나 백신이 바로 mRNA 백신이다.
이 교수는 “향후 인플루엔자 대유행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개선된 범용 인플루엔자 백신 기술의 개발·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충분한 물량을 비축하는 등 사전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H5N1
바이러스 표면의 대표적인 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HA)은 인체 세포에 달라붙는 열쇠가 되며, 뉴라미니디아제(NA)는 증식 후 인체를 떠나게 해준다. HA는 16종, NA는 9종이 있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일으키는 H5N1형은 HA 5형, NA 1형이라는 뜻이다. 미국에서 젖소를 통해 H5N1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사람들은 모두 농장 근로자였다. 오염된 소젖을 짜다가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