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작물인 감자는 우리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재료이다. 튀김으로 먹고, 삶아서 샐러드를 만들고, 캠핑 가서 모닥불에 구워 먹어도 맛있다. 하지만 한국인 식탁에 오르는 감자 품종은 데부분 미국의 ‘수미’와 일본의 ‘대지마’이다. 한국의 기후와 토양보다 다른 나라에 맞는 감자가 국내 농가를 차지한 것이다.
종자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감자의 최대 생산지인 강원도의 육종(育種)학자가 나섰다. 임영석 강원대 생명건강공학과 교수는 한국 기후와 토양에 맞춘 국산 품종 ‘골든킹(금왕감자)’과 ‘통일’을 개발했다. 두 품종은 유전자 조작 기술이 아닌 교잡육종으로 탄생했다. 교잡육종은 모(母)본과 부(父)본 품종을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 수천 개를 만든 뒤, 10%씩 남겨가며 최적의 품종을 찾는 방식이다. 교잡육종으로 생산성과 기능성을 갖춘 품종을 찾는 데에는 5~10년이 걸린다.
임 교수는 기자를 만난 지난 11일에도 오전 6시부터 감자밭으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감자를 가꾼 뒤에는 강원대에서 강의를 했다. 개발한 감자 품종이 어느 지역에서 잘 자라는지 확인해야 해 1년에 200일 이상은 감자 농장과 농민을 찾아 방방곡곡을 다닌다. 그가 육종학자로 33년 동안 연구실과 밭을 오가며 찾은 감자 품종만 20개가 넘는다. 춘천의 명물이 된 감자빵에 쓰이는 기능성 감자 품종 ‘로즈밸리’도 임 교수의 작품이다.
‘감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임 교수는 이번에 천연물 바이오 기술을 적용한 비건 화장품을 내놨다. 23년 만에 찾아낸 골든킹으로 얼굴에 바르는 토너와 크림을 개발했다. 임 교수는 “골든킹은 피부 염증을 억제하는 시링산과 4-하이드록시벤조산, 멜라닌 생성을 줄이는 클로로겐산이 풍부하다”고 했다. 그는 세바바이오텍과 협업해 보습과 미백, 주름 개선에 효과가 좋은 화장품을 만들었다. 이 회사는 특정 환경에 자라는 전체 미생물인 마이크로바이옴에 대한 기술을 갖고 있다.
화장품을 출시한 건 감자빵의 성공이 준 교훈때문이다. 임 교수는 “춘천 감자빵이 성공하면서 감자 품종을 브랜드화하고 가치를 높이면 팬덤(fandom·충성 고객)이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며 “골든킹 성분을 보니 화장품에 어울릴 거 같았고, 최근엔 화장품에 천연 원료를 많이 쓰니 개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골든킹을 화장품으로 만든 건 국산 감자 품종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 임 교수는 “한국이 감자 종자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며 “박사과정 때는 호박을 연구했지만, 국내 감자 주산지인 강원도로 온 이후엔 감자를 주로 연구했다”고 말했다.
강원 동해시 출신인 임 교수는 199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식물유전학 박사학위를 받고, 스웨덴 웁살라대 식물생리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임 교수가 귀국 후 찾은 곳은 고향 강원도에 있는 강원대였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감자에 대한 애정으로 변했다. 그는 “강원대와 강원도를 위해 주요 작물인 감자 연구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육종학자로서 책임감도 크다. 그도 과거엔 유전자 변형 작물(GMO)을 연구했다. 하지만 제초제 저항성 감자를 개발한 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초성분 글리포세이트를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을 지켜보면서 GMO 연구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만뒀다. 자신이 개발한 감자가 재배되면 발암물질인 제초제를 마음대로 써 피해가 커질 것을 걱정했다. 이후엔 새로운 감자 품종을 만들 때 느리지만 자연적인 방식인 교잡육종을 고집했다.
임 교수는 교잡육종으로 어렵게 개발한 감자 품종을 개발도상국에 보급하고 있다. ‘세계감자식량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우간다와 에티오피아, 이집트, 스리랑카에 개발한 감자 품종을 보급해 감자 생산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개발국이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받은 감자 품종을 내수용으로만 사용하면, 임 교수는 따로 기술료를 받지 않는다. 저개발국이 감자 생산 시스템을 발전시켜 감자 수출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기술료를 받는다.
저개발국들이 감자를 수출해 받은 기술료로 국제감자훈련센터를 설립하는 게 임 교수의 꿈이다. 감자 재배 기술이 떨어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알려주는 전문기관을 세우려는 것이다. 자신이 얻은 수익을 식량 위기를 겪는 국가에 다시 베푸는 구조다. 그는 정년 퇴임이 2년 정도 남았지만, 인터뷰 말미에는 20년 뒤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감자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따로 연구 시설을 짓고 있다.
임 교수는 “감자 영농 기술과 농업 교육이 열악한 지역을 방문해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발도상국들을 돕고 싶다”며 “한국에서 개발된 우수한 ‘K-감자’ 품종을 보급하면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식량 위기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풍부한 자연자원이 세계로 뻗어 나가면 천연물 바이오 산업도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참고 자료
Foods(2019), DOI: https://doi.org/10.3390/foods8030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