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000100)이 개발한 항암 신약이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문턱을 넘으면서 국산 항암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재 항암 신약 후보군(파이프라인)을 갖고 있는 업체는 많지만, 대부분 아직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거나 연구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소수 업체는 FDA에 도전했지만 잇따라 승인 심사에서 낙방했다.
업계는 당장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제2 렉라자’ 찾기에 나섰다. 유한양행과 같은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으로 벌써 다음 주자를 탐색하고 있다. 외부에서 항암 후보물질을 찾아 글로벌 신약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FDA로부터 한 번 쓴맛을 본 업체도 승인 서류를 재정비해 재도전에 나섰다.
◇한미, FDA 승인 좌절…HLB는 재도전
FDA는 21일 홈페이지에 유한양행의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와 존슨앤드존슨(J&J)의 자회사인 얀센의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의 병용요법이 표피 성장인자 수용체(EGFR) 변이가 있는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1차 치료제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개발한 항암제가 FDA로부터 승인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도 임상시험을 모두 마친 뒤 FDA의 승인 심사를 받았지만, 문턱을 넘지 못한 업체들도 있다. 한미약품(128940)과 HLB(028300)가 대표적이다. 한미약품이 미국 제약사 스펙트럼 파마슈티컬스과 공동 개발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포지오티닙은 ‘첫 국산 항암제’ 타이틀을 두고 렉라자와 라이벌 경쟁을 벌이며 기대를 받았다.
포지오티닙은 이전에 치료받은 경험이 있거나 사람 상피세포 증식인자 수용체 2형(HER2) 엑손20 삽입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국소 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다. 그러나 지난 2019년 11월 FDA는 ‘승인 불허’ 판정을 내렸다.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현재로서는 승인하기 어렵다는 보완요청서한(CRL)을 받았다.
스펙트럼은 포지오티닙의 추가 개발을 중단했다. 이후 스펙트럼은 주가가 1달러 밑으로 추락하며 나스닥 증권거래소로부터 상장폐지 경고까지 받았고, 결국 지난해 4월 미국 제약사인 어썰티오에 인수됐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현재 포지오티닙의 FDA 재도전 여부는 어썰티오에 달려 있다”며 “아직까지 향후 계획에 대해 전달받은 게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어썰티오가 FDA에 포지오티닙의 승인을 다시 신청했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HLB도 중국 항서제약과 개발 중인 간암 신약 툴베지오(성분명 리보세라닙)로 FDA 승인을 노렸지만, 지난 5월 역시 보완요청서한을 받으면서 좌절했다. 두 회사는 HLB의 리보세라닙과 항서제약의 면역관문 억제제인 캄렐리주맙을 간암 1차 치료제로 병용하는 요법으로 승인을 신청했다.
다만 HLB는 한미약품이 받은 보완요청서한과는 달리 리보세라닙의 효능이나 안전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받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HLB에 따르면 FDA는 항서제약에 ‘서류 재제출’을 강력 권고했는데, 이는 추가 임상 또는 연구 결과 등 새로운 서류 제출이 아닌 기존 자료를 보완하라는 의미였다. 항서제약은 오는 9~10월 FDA에 심사를 다시 신청할 예정이다.
HLB 관계자는 “툴베지오가 두 약물의 병용인데, 모두 FDA 허가를 받지 않은 약물이다 보니 FDA 측에서도 신중을 기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항서제약이 FDA와 소통하며 서류를 완벽하게 보완·시정했으니 이번에는 허가가 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회사는 재신청할 경우 6개월 안에 허가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성과, 국내사들도 계승
렉라자의 승인 소식에 국내 제약사들은 저마다 항암 파이프라인를 확보하기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렉라자는 전통제약사와 바이오기업의 가장 성공적인 오픈 이노베이션 결과로 꼽힌다. 지난 2015년 7월 유한양행은 국내 바이오기업 오스코텍(039200)의 자회사인 제노스코로부터 물질 개발 단계에 있는 렉라자를 도입해 물질 최적화부터 특허 획보, 전임상시험과 자체 임상 1상 시험을 진행한 뒤 2018년 11월 얀센에 글로벌 개발·판매 권리를 약 1조 6000억원 규모로 넘겼다.
유한양행은 ‘제2 렉라자’ 발굴을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혁신 신약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 지원 프로그램인 ‘유한 이노베이션 프로그램(YIP)’을 운영하고 있다. 자체 신약을 발굴하기보다 성장성이 높은 신약 기술을 적극 도입해 자체 기술력으로 흡수한다는 전략이다.
국내 다른 제약사들도 마찬가지다. 대웅제약(069620)은 지난해 온크로스, 넥스아이, 씨어스, 브이원바이오, 엑소스템텍 등 9개 항암 신약개발 전문 바이오벤처에 132억원을 투자했다. 보령제약은 지난해 2월 에스엔바이오사이언스와 세계 최초 나노입자 항암제 후보물질인 SNB-101의 공동개발과 국내 독점판매 계약을 맺었다.
동아에스티(170900)도 최근 일동제약(249420)의 표적항암제 개발 계열사인 아이디언스에 250억원을 지분투자했다. 아이디언스는 위암, 유방암, 난소암 등 다양한 암종을 타겟으로 하는 표적항암제를 개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