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사 HLB(028300)의 간암 신약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주식시장 개장과 동시에 HLB 주가는 하한가로 직행했고, 상승세로 출발했던 중국 파트너 항서제약 주가도 하락세를 보였다. HLB가 중국 파트너사인 항서제약과 협의해 FDA에 신약 허가 재신청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성공하더라도 미국 품목 허가는 1년 6개월 이상 지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진양곤 HLB회장은 17일 미국 FDA로부터 자사 간암 신약인 리보세라닙과 항서제약의 캄렐리주맙의 병용요법을 간암 1차 치료제로 허가 신청한 것에 대해 보완요구서한(CRL)을 받았다고 밝혔다. CRL은 FDA가 신약 허가를 반려하면서, 이번에 승인하지 않은 이유와 앞으로 보완할 내용을 설명해주는 절차다.
진 회장은 CRL을 토대로 이번 승인이 거절된 것은 중국 파트너사인 항서제약의 면역항암제인 캄렐리주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진 회장은 “캄렐리주맙 제조 공정에 대한 지적에 항서제약 측 답변이 FDA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FDA가 항서제약을 실사하는 과정에서 캄렐리주맙의 화학·제조·품질관리(CMC)에 문제를 발견해 보완을 요청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 회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실시한 임상시험과 관련한 현장 실사가 전쟁 등의 이유로 불가능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진 회장은 “글로벌 의약품을 17개나 보유한 항서제약의 제조 공정에 수정 불가능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투자자들을 안심시켰지만, 개장과 동시에 시장은 요동쳤다.
이날 오전 코스피와 코스닥에 상장한 8개 HLB그룹사 주식은 일제히 하한가를 기록했다. HLB 주가만 5조 275억원이 증발했다. HLB의 주가가 급락한 것은 간암 신약 미국 허가 기대감으로 이 회사의 주가가 최근 급등한 영향도 있다. HLB의 시가 총액은 지난 1월 6조원대에서 최근 12조5000억원대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파트너사인 항서제약의 주가는 상하이 증시에서 전날(16일) 비만 신약 후보물질을 미국 허큘레스에 기술이전했다는 소식에 상승 출발했으나, 오전 11시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전날보다 0.31%가량 떨어졌다가 보합 상태에서 마감했다. 이 회사 홈페이지에는 캄렐리주맙과 관련해 이렇다 할 공지는 올라오지 않고 있다.
시장이 HLB가 FDA 승인을 받지 못한 데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이 회사가 최근 공개한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 병용 요법 임상 3상 시험 결과에 투자자들이 크게 고무됐기 때문이다. 두 의약품의 병용요법은임상 3상에서 환자생존기간(mOS)이 22.1개월을 기록했다. 이는 기존 표적항암제인 ‘아바스틴’과 면역항암제인 ‘티쎈트릭’ 병용 요법의 기록(19.2개월)을 뛰어넘는 수치다.
문제는 FDA의 이번 결정으로 리보세라닙의 신약 허가가 상당 기간 지연될 것이란 점이다. 항서제약이 FDA가 문제 삼은 캄렐리주맙의 화학제조품질(CMC) 공정 문제를 곧바로 해결한다고 해도, 공정 변경 전후의 의약품 품질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까지 1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 이후 미국 FDA에 재허가를 신청해도, 6개월 가량 심사 기간이 필요하다. 1년 6개월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신약 개발은 ‘개발 시간’과의 싸움이다. 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를 병용하는 요법으로 HLB의 강력한 경쟁 상대는 스위스 로슈와 미국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였다. 두 회사는 ‘니볼루맙(표적항암제)’과 ‘이피리무밥(면역항암제)’ 병용 요법으로 간암 임상 1상 시험에 성공하고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HLB가 이날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으로 승인을 받았다면 안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허가가 1년 이상 늦어지면 로슈와 BMS에게 시장을 빼앗길 수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 미중 갈등이 FDA의 이번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최근 중국 제약·바이오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리보세라닙과 캄렐리주맙은 중국에서 이미 의약품으로 허가를 받고 쓰이고 있다.
이날 HLB의 주가 하락이 다른 신약개발 기업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업계는 이번 사태가 국내 신약 개발사에 대한 투자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도 한 회사가 신약 개발에서 실패하면 관계없는 제약바이오기업 주가가 하락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