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글로벌 제약업계에서는 차세대 항체약물결합체(ADC)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조 단위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아직 금리 인하 신호가 켜지지 않아 투자 시장 전반에 활기가 돌지 않지만 차세대 항암제 시장을 두고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ADC 기술 선점을 위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8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4월 들어 글로벌 제약·바이오기업들이 ADC 관련 기업을 사들이거나 기술을 도입하는 계약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본사를 둔 생명공학기업 젠맙(Genmab)은 지난 3일(현지 시각) ADC 기업 프로파운드바이오(ProfoundBio)를 18억달러(약 2조4327억원)에 인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프로파운드바이오는 미국 시애틀에 본사를, 중국 쑤저우에 R&D 센터를 둔 비상장 기업인데 ADC 후보물질인 PRO1184를 핵심 파이프라인으로 두고 있다.
ADC는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약물을 전달하는 차세대 항암제다. 암세포를 제대로 표적 하지 못하거나 다른 정상세포에도 손상을 일으키는 기존 항암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술로 꼽힌다. 마치 미사일(항체)이 표적(암세포)에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가 탄두(약물)를 터뜨리는 것과 같다. 그만큼 다른 세포에 손상을 주지 않아 부작용이 적으면서도 치료 효과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젠맙이 확보하는 파이프라인 PRO1184는 엽산수용체알파(FRα) 항체와 친수성 절단형 링커, 약물인 엑사테칸을 페이로드로 적용한 ADC 후보물질이다. ADC는 항체, 페이로드, 링커 등 3가지 요소가 연결된 형태이다. 항체는 암세포 표면의 특정 항원 단백질에 결합한다. 페이로드는 약효를 내는 성분으로, 화학적 링커를 통해 항체에 달라 붙는다. 링커는 항체와 페이로드를 연결하고 비종양 조직에 도달하는 페이로드의 양을 줄이는 기능을 한다.
프로파운드바이오는 현재 고형암과 난소암, 자궁내막암, 비소세포폐암,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PRO1184의 임상 1상과 2상 시험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젠맙은 “새로운 ADC 기술 플랫폼과 젠맙의 독점 항체 플랫폼이 결합해 암 치료를 바꾸고 환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신약을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글로벌 제약사인 애브비(Abbvie)와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도 난소암과 유방암, 폐암, 신장암 등 상피 유래 종양에서 과잉 발현하는 FRα를 겨냥한 ADC 파이프라인을 개발 중이다.
독일 머크도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캐리스 라이프 사이언스(Caris Life Science)와 ADC 파이프라인 도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계약 규모는 최대 14억달러(1조 8921억원)에 이른다.
캐리스 라이프 사이언스는 미국 텍사스에 본사를 두고, 뉴욕, 일본 도쿄, 스위스 바젤에 지사를 두고 있는 AI 기술 바이오 기업이다. ‘ADAPT’라고 명명한 환자 혈액을 기반으로 새 분자 타깃을 발굴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프랑스 제약사 입센은 지난 2일(현지 시각) 미국 수트로 바이오파마(Sutro Biopharma)와 ADC 후보물질 STRO-003에 대한 독점 라이선싱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암세포에서 발현하는 ROR1 항원을 겨냥한 ADC 파이프라인 확보에 나선 것이다. 선불금 9000만달러(1219억원)과 함께 개발비, 규제·상업 마일스톤 지불금과 지분 투자를 합친 총거래 규모는 약 9억달러(1조2191억원)에 이른다.
이 후보물질은 고형암과 혈액암을 포함한 다양한 암 유형에서 과발현되는 것으로 알려진 ROR1 종양 항원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현재 전임상 개발 최종 단계에 있다. 입센은 이번 계약으로 STRO-003의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전 세계 독점 권리를 갖게 된다.
입센은 “STRO-003은 포트폴리오에 추가되는 첫 번째 ADC 후보물질”이라며 “고형암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나타낸 엑사테칸 약물이 결합한 ADC 후보물질로 곧 임상 1상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국내 기업들도 지난해 잇따라 계약
국내에서는 지난해 하반기 글로벌 기업과의 ADC 기술 이전 계약이 잇따랐지만 올해 들어서는 아직 큰 거래 소식이 나오지 않고 있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현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가 지난해 12월에 존슨앤드존슨(J&J)의 자회사 얀센 바이오테크와 기술 이전 계약을 각각 맺었다. 이는 국내 기업의 기술이전 역사상 단일 물질로 최대 금액을 기록했다. 계약 규모는 선급금 1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300억원), 단독개발 권리행사금 2억달러(2600억원), 상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을 포함해 최대 17억달러(약 2조2400억원)에 이른다.
순매출 발생에 따라 별도의 로열티를 지급받는다는 조건도 달렸다. 레고켐과 얀센은 임상 1상과 2상시험을 진행 중이며, 단독 개발 권리 행사 이후에는 얀센이 전적으로 임상개발과 상업화를 책임지기로 했다. 레고켐은 앞서 지난 2022년에는 암젠과 최대 1조605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기도 했다.
오름테라퓨틱은 작년 11월 브리스톨마이어스퀴브(BMS)에 단백질 분해 약물을 페이로드에 적용한 ‘ORM-5151′을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 규모는 계약금과 추후 받게 되는 추가 마일스톤을 합쳐 총 1억800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2334억원)에 이른다. 이 중 계약금 1억 달러(약 1298억원)를 먼저 받았다.
ORM-5151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과 고위험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치료제를 겨냥하고 있다. 작년 초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임상 1상 승인을 받았다. ORM-5029는 HER2 타깃 항체에 오름이 자체 개발한 GSPT1 표적단백질분해제(TPD)를 결합한 ADC 후보물질이다.
TPD는 체내 단백질 분해 시스템을 이용해 질병을 유발하는 단백질 또는 분해하고자 하는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표적, 이를 제거하거나 비활성 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ADC와 같이 목표물을 선택적으로 표적해 최종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거나 발현을 방지하는 신약 개발 기술이다. ORM-5029는 TPD를 페이로드로 사용한 ADC 가운데는 세계 최초로 작년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는 “ADC도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며 “초기 ADC가 흑백TV라면 TPD를 결합한 ADC는 컬러TV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전쟁할 때 다양한 폭탄이 필요하지 않느냐”며 “TPD라는 차별화된 폭탄(페이로드)을 쓰는 게 오름의 전략”이라면서 “ADC 기술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기존 항암제의 한계를 넘을 주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