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기업인 OCI그룹과 한미그룹 통합, 식품회사인 오리온의 레고캠바이오사이언스 인수합병(M&A) 발표 이후 이종 산업 간 성공한 사례에 대한 관심이 크다. OCI홀딩스의 이우현 회장이 한미와 통합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독일 기업 바이엘을 예로 들었다.
1990년대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화학 식품 기업이 제약사를 인수해 업종을 전환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독일 바이엘과 일본의 스미토모가 대표적이다. 일본의 후지필름은 2000년대 머크의 바이오 의약품 사업부문을 인수하며 바이오의약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 제약바이오 인수합병 83%가 동종 결합
19일 파마스앨머낙에 따르면 지난 1995년부터 2011년까지 글로벌 제약 산업에서 성사된 17개의 대규모 합병을 분석한 결과 60개 제약사가 10개의 글로벌 대기업으로 통합되고, 지난 30년 동안 110개 제약사가 30개로 합쳐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8년 기준 글로벌 상위 10개 제약사 가운데 길리어드를 제외하면, 100년 역사를 가진 전통 제약사였다. BMS는 브리스톨마이어스가 스퀴브와 합병하며 생겼고, GSK는 글락소가 스미스클라인비챔과 합병하며 출범했다. 아스트라제네카도 아스트라와 제네카가 합병한 회사다.
화이자는 업존, 워너램버트 등을 인수하면서 큰 회사다. 끊임없는 M&A를 통해 스스로를 재창조하면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성장이 정체됐을 때 M&A를 활용해 돌파구를 찾는다. 특히 제약산업에서 M&A는 중요한 성장 전략 중에 하나로 꼽힌다.
다만 이탈리아 루이스대의 ‘M&A 및 전략적 제휴의 동인(2020)’ 논문에 따르면 최근 20년 동안 제약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나타난 M&A의 83%가 같은 업종 내 인수합병으로 나타났다. 최근 OCI와 오리온처럼 이종 통합이 흔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 보고서는 이종 결합이라도 핵심 사업 연관성이 있는 ‘자매’ 업종에서 M&A가 성공적이라고 봤다. 예를 들어 식품 업계는 유통업체나 농업임업 등과 통합이 이뤄진 식이다. 호텔 및 카지노 산업은 엔터테인먼트나 부동산 투자 등에서 계약이 체결됐다.
◇ 40개 회사 인수해 후지필름 다이오신스 탄생
이종 M&A로 제약 바이오 기업으로 성공한 케이스로는 후지필름이 꼽힌다. 1934년 설립한 일본 후지필름은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한 이후 신성장 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화장품 산업에 뛰어들었고, 제약 바이오 기업을 인수하면서 변신에 성공했다.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회장은 “후지필름은 백그라운드 기술을 바탕으로 제약을 찾아낸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후지필름은 지난 2008년 일본 중견제약사인 도요마 케미컬을 인수한 후 2011년 머크 바이오의약품 사업부를 약 4억 9000만 달러(약 6557억 원), 2016년 다케다 제약의 와코 퓨어 케미칼 지분 71%를 13억 달러에 사들였다. 이렇게 설립한 후지필름 다이오신스는 론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어깨를 견주는 바이오의약품 업체가 됐다. 후지필름 다이오신스의 지난 2022년 연매출은 1억 2430만달러였다.
후지필름의 제약 바이오 산업 전환은 ‘자매 업종’을 찾는 데서 시작했다. 필름의 주성분인 젤라틴은 인간 피부의 70%를 구성하는 성분이다. 그리고 컬러 필름을 흐려지게 하는 원인인 산화는 피부를 노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후지필름은 이 같은 산화 작용을 80년 넘게 연구했고, 이를 노화 방지 화장품에 활용했다.
후지필름의 성공 비결은 위험 분산이라고 봤다. 후지필름은 10년 동안 60억 달러를 들여 40개 회사를 인수했는데, 추후에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지식이나 경험 부족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물을 넓게 던졌다”고 설명했다.
◇ 분유회사에서 백신 회사로 GSK
오리온처럼 식품에서 제약기업으로 변모한 곳도 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다. GSK의 전신인 글락소는 뉴질랜드 웰링턴의 종합무역회사로 시작했다. 이 회사는 뉴질랜드 농장의 우유로 분유 사업을 시작해 글락소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게 시초다.
이 회사는 1924년 글락소 랩을 통해 먹는 영양제인 비타민D 제품을 개발하며 식품 회사 모습을 갖췄다. 이후 1958년 앨런 핸즈버리, 1978년 메이어 랩(Meyer Lab) 등 제약사를 인수한 후 1983년 미국 노스케롤라이나로 제조시설을 이전하며 제약사로 자리를 잡았다.
글락소가 글로벌 제약사로 발돋움한 것은 1995년 영국 제약사인 버로우웰컴과 합병하며 글락소웰컴을 설립하면서부터다. 1999년까지 글락소 웰컴은 매출 기준 세계 4위 제약사가 됐다. 나아가 현재의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탄생한 배경은 글락소가 지난 2000년 미국 제약사 스미스클라인 비참을 인수하면서 부터다.
스미스클라인은 1830년 미국 필라델피아 스미스 약국이 모태인 제약사로 1960년대부터 백신을 주로 개발해 왔다. 1989년 스미스클라인이 비참그룹과 합병해 스미스클라인 비참을 설립했고, 본사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전했다.
◇ 염료 화학에서 태동한 제약산업
바이엘은 지난 1863년 독일 레버쿠젠의 화학 염료 기업으로 시작해, 현재 제약(전문의약품), 소비재(일반의약품), 농업(작물사업부) 3개 축으로 구성된 거대 생명공학 기업으로 성장했다. 매출의 절반이 농업과 제약에서 발생하는데, 농업과 제약 모두 M&A로 확보했다. 바이엘은 지난 2018년 농업 종자회사인 몬산토를 인수하고, 2020년 세포·유전자 치료제를 개발하는 바이오테크인 애스크바이오 등을 인수했다.
노바티스도 거슬러 올라가면 염료회사였다. 노바티스는 지난 1996년 스위스 회사인 시바 가이기(Ciba-Geigy)와 산도스가 합병하면서 탄생했다. 시바 가이기는 1758년 스위스에 설립된 염료제 회사인 JR가이기와 시바 합병한 회사다.
이 밖에 일본 스미토모화학은 1913년 비료 업체로 시작해 1940년대 염료 및 원료의약품, 알루미늄, 1950년대 에틸렌 등 석유화학으로 사업을 다각화했고, 지난 2005년 다이니폰제약을 합병해 현재의 구조가 됐다. 현재 전자화학, 석유화학, 에너지, 농업, 제약 등 5개 사업부문을 갖고 있다. 매출의 20%가 제약에서 나온다.
하지만 1990년~2010년 모델을 직접 대입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회장은 “1990년대 M&A는 케미컬 의약품이 나오던 시기라면, 지금은 바이오 의약품을 넘어 세포 유전자 치료제가 태동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 업계에서는 의미있는 신약 개발에 성공하려면 연구개발에 연 20억~40억 달러(약 3조~5조원)를 지출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글로벌 제약사는 매출의 20%를 연구개발에 투자할 정도다. 이 회장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현금이 풍부한 기업들이 신약개발을 전격 지원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