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의 한 약국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먹는 치료제인 화이자사의 팍스로비드가 놓여 있다./뉴스1

코로나19 대유행 때 백신 치료제를 무더기로 사들인 미국과 유럽의 부국들이 때아닌 ‘낭비’ 논란에 휩싸였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년 전 사들인 치료제의 유효기간 만료가 도래하면서 무더기 폐기를 앞둔 것이다. 반면 치료제 물량 확보에 실패했다고 질타를 받았던 한국은 폐기할 물량이 없어 ‘전화위복’이 된 모양새다.

2일(현지시각) 헬스케어 시장 분석 회사인 에어피니티(Airfinity)에 따르면 오는 2월 말까지 유럽에서 22억 달러(약 2조 8000억원)규모의 팍스로비드 310만 개가 유효기간 만료로 폐기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앞서 지난해 11월 팍스로비드 150만 개가 유효기한이 만료되기도 했다. 보고서는 팍스로비드 처방이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올해 6월 말까지 220만 개가 추가 폐기될 것으로 내다봤고,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전체에서 예상보다 팍스로비드 처방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팍스로비드는 오미크론 변이가 등장한 2022년 상반기 시장에 처음 나왔다. 니르마트렐비르과 리토나비르로 구성된 팍스로비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복제를 막아, 감염 이후 상태가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는 효과를 입증했다.

약값이 1회분에 60만 원에 이를 정도로 비싸지만 감염병 대응 압박을 받은 각국 정부가 직접 구매에 뛰어들면서 확보 경쟁이 불었다. 화이자는 팍스로비드로 출시 첫해에만 190만 달러(약 24조 9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22년 12월 중국 암시장에서 팍스로비드 한 상자가 정가 약 2300위안(약 42만4000원)의 20배가 넘는 5만 위안(약 900만 원)에 팔렸다.

하지만 작년부터 이런 분위기는 반전됐다. 화이자는 팍스로비드 지난해 매출은 2022년과 비교해 95% 급감한 약 10억 달러(약 1조 3100억원)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코로나19 대응 의료체계를 일반 의료체계로 전환하면서, 사용하지 않고 비축한 팍스로비드 790만 명분을 화이자에 반품했다. 이는 42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른다.

화이자는 각국 정부와 팍스로비드 유효기간 연장 협의에 나섰다. 허가 당국은 신약을 긴급하게 승인할 때 유효기간을 최대한 짧게 설정한다. 임상 데이터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이자는 팍스로비드는 최근 2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쓰이면서 임상 데이터가 확보됐고, 유효기간 연장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팍스로비드 유효기간은 9개월에서 12개월, 18개월을 거쳐 일부 국가에서는 24개월까지 늘어났다.

한국 정부는 팍스로비드 유효기간 만료에 따른 폐기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질병청에 따르면 이날 현재 국내 보유한 팍스로비드 물량은 창고에 비축된 9만 명분과 현재 보건소와 병원에 배포된 물량을 포함해 총 15만 명 분이다. 유효기간이 가장 임박한 보유도 2025년 1월 물량이라는 것이 질병청 설명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이번에 팍스로비드 대량 폐기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국내에서 확보한 물량이 선진국과 비교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코로나19 변이인 오미크론이 확산하자 총 76만 명 분의 팍스로비드를 초도 물량으로 계약했는데,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공급 물량이 모자라 대량 수입할 수 없었다. 처방 대상도 고위험군으로 처방을 제한하고, 재고가 부족하지 않도록 필요 물량을 꾸준히 조절해 왔다. 국내에서는 지금도 60세 이상 고령층과 12세 이상 기저질환자, 면역저하자만 처방받을 수 있다.

김경호 질병청 비축물자 관리과장은 “한국은 고위험군에 대한 코로나19 치료제 무상 지원 원칙을 유지하고 있어서 수요가 꾸준히 있다”며 “오히려 물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수급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올해 상반기 코로나19 위기 대응 체계가 일반 의료체계로 전환되고, 백신 치료제가 건강보험 급여 대상에 편입되면 정부에서 팍스로비드를 구입해 공급할 필요가 없어진다. 다만 시기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복지부와 제약사 건강보험공단의 가격 협상은 오래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