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일본 송도의 넥스트바이오메디컬 사무실을 한 일본 의료기기 대기업 회장이 찾았다. 그가 인천을 찾은 이유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관절염 ‘통증색전(塞栓·막는)술’과 관련된 기술에 관심이 있어서다. 시가총액 7조 원(7630억 엔) 규모의 이 기업은 의료용 카테터(가느다란 관)를 주력 사업으로 하는 곳인데,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이 개발한 색전술 치료재에 관심을 보였다.
색전술은 암세포와 염증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 등을 막아 치료하는 시술법이다. 원래는 암 수술에 주로 쓰였다. 하지만 일본 게이오대 의대 영상의학과 교수 출신의 오쿠노 유지가 염증과 통하는 혈관을 막으면 통증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통증 치료에 적용하면서 널리 보급됐다.
오쿠노 클리닉은 지난 2017년 요코하마에 개원한 이후 5년 여 만에 지점이 8개로 늘었다. 이 곳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온 많은 만성통증 환자가 줄을 잇는다고 한다. 오쿠노 원장 색전술 시술에 한국의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이 생산한 치료재가 쓰인다. 이돈행 넥스트바이오메디컬 대표는 “일본 기업은 카테터로 세계 1~2위를 다투는 곳인데, 혈관 카테터와 색전술 치료재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오쿠노 원장이 우리 회사를 일본 기업에 소개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소화기내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인하대 병원에서 소화기내과 교수로 일하며 2014년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을 창업했다.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의 또 다른 제품으로 가루형 지혈재인 ‘넥스파우더’가 있다. 이 제품은 카테터를 통해 가루 형태의 지혈재를 환부에 뿌리면 물과 만나 접착성젤로 변하면서 빠르게 출혈을 막는다.
이 제품은 이 대표가 소화기내과 전문의로 응급실에 불려 가 지혈하던 경험을 살려 개발했다. 지난 202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았다.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인 메드트로닉과 해외 판권 계약을 맺고, 북미와 유럽에서 팔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2010년 세계에서 세 번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지름 11㎜, 길이 24㎜의 캡슐내시경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미국 유타대 고분자공학과에서 연수를 받은 특이한 이력이 있다. 이 대표는 “의사의 실용적 아이디어와 공학자의 기술이 합쳐지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달 4일 회사를 방문했을 때 회사 1층 로비에서는 미국과 유럽 병원에서 방영하는 영상과 같은 넥스파우더의 홍보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얼마 전에 일본 의료기기 대기업 회장이 다녀갔다고 들었다. 어떤 얘기를 나눴나.
“색전술 치료재인 넥스피어 기술이전을 논의했다.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해서 회사 전체를 둘러봤다. 넥스피어는 관절염 색전술 치료재로는 가장 앞선 제품이다. 관절염 색전술을 개발한 일본의 오쿠노 유지 원장이 의료기기 업체를 소개했다. 현재 협상 막바지 단계에 있다.”
-넥스피어는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 소화기내과 교수 출신인데, 혈관을 막는 의료기기를 개발했다니 의외다.
“소화기인터벤션학회라는 게 있다. 지난 2019년 그 학회에서 빨리 녹는 색전물질을 개발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지금 시중에 있는 색전술 치료재는 녹지 않는 성분인데, 몸 속에서 안전하게 녹는 물질만 개발되면 게임체인저가 될 거라고 했다.”
인터벤션(중재술) 영상의학과의 한 분과다. 혈관에 약물을 집어 넣어 막힌 부분을 뚫거나 혈관 출혈을 잡는 일을 한다. 혈관 외 다양한 부위에 약물을 집어넣는 작업을 전담하기 때문에 인터벤션 의사가 없으면 웬만한 큰 수술은 어렵다. 대동맥 질환 등 혈관 질환은 심장내과와 심혈관외과, 대장암은 소화기내과와 협업한다.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이 색전술을 시술한다.
-혈관을 막는 재료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녹지 않는 물질로 혈관을 막았다가는 혈관이 막혀버린다. 그러면 주변 부위가 괴사한다. 반대로 너무 빨리 용해되면 염증이 살아남아서 통증 완화 효과가 없다. ‘넥스피어’는 2~6시간 안에 용해되고, 필요한 만큼 용해 시간 조절도 가능하다. 녹지 않는 물질을 넣으면 부작용이 심해서 오쿠노 클리닉에서 처음엔 항생제를 넣었다고 한다.”
-항생제를 혈관에 넣는 게 가능한가.
“과거에도 불법이고, 지금도 불법이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 오쿠노 클리닉이 우리 제품을 쓴다. 엊그제도 오쿠노 클리닉에서 200개 주문을 해서 보냈다.”
-오쿠노 클리닉은 어떻게 알게 됐나.
“오쿠노 클리닉이 개원한 게 2017년이고, 2019년쯤 한국에 관절염 색전술이 처음 들어왔다. 넥스피어를 개발한 후 한국 교수의 소개로 오쿠노 원장의 시술 장면을 직접 봤다. 환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통증 정도를 확인한 후 그 부분 혈관을 막았다.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시술 1시간 후에 스스로 일어나서 나갔다. 깜짝 놀랐다.”
오쿠노 원장은 올해 4월 서울에서 열린 아태혈관색전학회에서 넥스피어로 치료한 178명의 환자 임상 데이터를 공개했다. 한국에서도 통증클리닉을 중심으로 색전술이 대중화됐다.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시술비가 비싸지만, 뛰어난 통증 완화 효과에 어르신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미국에서 관절염 색전술 허용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라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넥스피어를 미국이나 일본에서 허가받는 것도 고려하고 있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무릎 퇴행성 관절염 환자를 대상으로 한국 식약처 임상시험 계획(IND)승인을 받고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최근 미국 FDA와 미국 임상에 대한 사전미팅을 끝내고 미국 임상시험을 위한 프로토콜 작성중에 있고 2024년에 임상시험을 시작할 예정이다. 일본도 일본 의료기기회사가 일본 임상시험을 진행해 일본 PMDA 인증을 받을 예정이다. 본 허가와 판매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넥스피어 외에 가루형 지혈재를 개발했다고 들었다. 어떤 제품인가.
“넥스파우더라는 제품이다. 젊었을 때 위궤양 출혈 등을 막는 내시경 지혈술 때문에 응급실에 자주 불려 다녔다. 내시경으로 지혈을 하면서, 출혈이 우려되는 상처를 덮고 싶다는 생각에 개발을 시작하게 됐다.”
-내시경 시술을 할 때 출혈이 많이 생기나.
“대학병원은 소화성 위궤양이나 십이지장 궤양 출혈로 응급실에 오는 어르신 환자들이 많다. 이런 환자들은 지혈 후에도 재출혈이 많다. 내시경 절제술이 결코 쉬운 술기가 아니다. 한 대학병원에서 내시경 절제술을 할 수 있는 숙련된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이직해, 그 병원이 비상에 걸린 일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지혈재가 있으면 숙련도가 떨어지는 의사들이 출혈에 대한 부담이 줄어 내시경 절제술이나 내시경 지혈술을 수 있게 된다.“
-메드트로닉이 넥스파우더의 유럽 미국 판매를 맡았다고 들었다. 메드트로닉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
“2017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소화기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고, 거기서 만난 미국 교수가 소개해 줬다. 넥스파우더가 2018년 12월에 유럽 CE를 받자, 메드트로닉에서 일본 중국을 제외한 지역의 제품 판권을 달라고 했다. 지난 2019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드트로닉 부회장(VP)을 만나서 제품 소개와 임상 결과를 공개했고, 그 자리에서 연구 및 판매 협력을 하기로 했다.”
-업무 협약을 맺은 건 2019년 9월인데, 올해부터 미국 유럽 판매가 됐다. 왜 이렇게 늦었나.
“우리 공장이 메드트로닉 품질보증(QA) 기준에 맞지 않았다. 메드트로닉 싱가포르 지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이 1년 동안 일주일에 3~5일씩 출근해서 QA를 정비했다. 지금 송도 공장은 품질 생산 리스크 관리부터 사후 관리까지 메드트로닉 기준으로 끌어올렸다.”
-해외 반응은 어떤가.
“코로나19 직전인 지난 2020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학회에서 메드트로닉과 함께 유럽의 소화기내과 의사 6명을 만나서 제품을 소개했다. 사용하기가 너무 편해서 젊은 의사들이, 내시경 의술 배우기를 게을리할까 봐 그게 걱정된다고 하더라(웃음). 내년 미국에서 27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다. 임상 비용은 메드트로닉이 부담한다.”
이 대표는 이날 본사 물류창고에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을 앞둔 제품을 소개했다. 이 대표는 “올해 매출은 작년 20억 원의 2배 이상인 50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며 “내년 매출은 여기의 두 배인 100억 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넥스파우더에 이어 넥스피어까지 연달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성공 비결이 있나.
“미국 일본 의사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또 공학자들과 같이 문제점을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젊고 열정이 있는 공대 교수들과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믿고 맡겼다. 사업을 하려면 구성원이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유타대에서 공학을 공부한 경험이 밑바탕이 된 건 아닌가.
“나는 사실 지금도 고분자 원리는 잘 모른다. 유타대 연수를 계기로 고분자를 연구하는 공학자들을 알게 된 건 맞다. 의료 기기는 ‘수요’가 제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성공하는 의료 제품을 개발하려면 공대랑 의대가 만나야 한다. 공대 교수들은 기술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 것을 고민한다.“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은 내년 상장에 도전한다. 이 회사가 상장에 성공하면 소화기내과 전문의(MD)가 창업해 상장에 성공한 첫 바이오벤처가 된다.
-의사 과학자를 활성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병원에 있는 많은 의사들이 연구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정부가 연구비 등 인센티브 제도를 줘야 한다. 대학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다들 갖고 있다. 하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똑같은 월급을 지급하는데, 연구한다고 일(진료)을 안 하는 의사는 좋게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연구하는 교수가 병원에 손해를 주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연구 전임 의사가 있어야 한다.”
-정부가 한 해 연구개발(R&D)에 수십조원을 투입한다. 적지 않은 규모다.
“대부분의 정부 지원 사업은 한 번에 수억원 단위로 규모가 크다. 사업 규모가 크다는 것은 젊은 연구자들이 도전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병아리에게 독수리가 하는 일을 하라고 해선 안되고 할 수도 없다. 이들이 연구에 흥미를 갖고 뛰어들 수 있게 씨앗을 뿌리는 소규모 연구비가 많아야 한다. 그래야 젊은 교수들이 연구에 흥미를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젊은 교수 시절 연구비 지원을 받은 게 시작이었다.”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의 제품은 어떻게 평가하나. 세계 1등이라고 생각하시나.
“지금은 우리 제품이 제일 좋지만, 언제 더 좋은 제품이 나올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경쟁 제품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요즘 소화기 분야에 있는 바이오벤처들이 항암제, 비만⋅당뇨, 치매 등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서 (지혈재 분야는) 경쟁이 좀 덜 치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