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용 의료기기 업체인 루메니스(Lumen is)와 인모드(Inmode)는 이스라엘 강소기업으로 시작해 세계 시장을 석권한 대표적 기업이다. 루메니스는 빛(레이저)을 이용해 피부 속 기름층을 녹이는 IPL 기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인모드는 고주파를 이용해 피부를 재생해 탄력을 개선하는 의료기기로 시장을 선도한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인모드의 시가 총액은 30억 달러(3조 9330억원)가 넘는다. 루메니스는 미용을 제외한 수술용 레이저 사업부만 지난 2021년 미국 보스턴사이언티픽에 10억 7000만 달러(약 1조 4200억원)에 매각해 화제가 됐다.
두 회사와 비교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올해 5월에 한국 의료기기 스타트업인 이오플로우가 미국 의료기기 업체인 메드트로닉에 7억 3800만 달러(약 9710억원)에 인수합병(M&A)됐다. 국내 의료기기 업체가 세계 시장에서 1조 원에 육박한 금액으로 매각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이오플로우는 인공지능(AI) 인슐린 펌프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국내에서는 ‘알짜 기업을 해외에 빼앗겼다’는 반응이 나왔다. 국산 의료기기 기술이 해외로 유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산업 생태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의료기기와 의약품은 사람 생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각국 정부 규제가 매우 강하고, 이 때문에 ‘한국 토종’을 내세워서는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오플로우의 M&A를 두고 “한국 의료기기 기업이 1조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 글로벌 의료기기 키운 이스라엘 강소기업 비결
이스라엘 의료산업의 성공 배경에는 이스라엘 정부의 ‘혁신’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한국처럼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전 국민이 4개의 국가건강보험(HMO)에 가입한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정부는 지난 25년간 축적한 보건 의료 데이터를 익명, 디지털화해 의료 스타트업이 연구개발(R&D)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혁파했다.
이스라엘은 과학을 믿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국민성으로도 유명하다.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가 개발한 mRNA(메신저리보핵산) 코로나19 백신을 가장 먼저 국가 접종을 한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바이오엔테크는 현재 이스라엘에 R&D센터와 생산기지를 짓고 있다.
이스라엘은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년 기준 이스라엘의 헬스케어 분야 스타트업은 1600여개가 넘는다. 스타트업의 젊은 피를 수혈받으려는 수백 개의 다국적 기업들이 몰려든다. 기술 스타트업의 매각과 합병도 잦다. 다국적 기업들이 스타트업을 인수해서 연구소를 설립하고, 사업을 키우는 식이다.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100여 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3위다.
이러다 보니 전 세계가 투자를 줄이는 팬데믹 기간에도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늘었다. 이스라엘은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단 한 곳도 없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 5358달러 (약 7362만원)에 이른다.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4983달러다. 이스라엘 경제의 성공 비결은 ‘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아낌없는 투자와 지원이었다.
◇ ‘1조’ 매각 신화 이오플로우 성공 스토리
한국의 이오플로우가 혈당측정기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범부처 전주기 의료기기 연구개발 사업단의 물밑 지원이 있었다. 의료 제품은 시장에 나오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제품의 유효성은 물론이고, 사람에게 써도 안전한 지 임상시험으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임상하려면 ‘사람’에게 써도 된다는 임상 계획(IND)부터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아야 한다.
이오플로우는 임상시험 계획을 세우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모바일 기기와 연결한 연속 혈당측정기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다 보니, 임상 계획은 물론이고 기준까지 만들어야 했다. 제품이 먼저냐 규제가 먼저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에 봉착했다.
기술의 잠재력을 알아본 범부처 사업단이 해결사로 나섰다. 사업단은 2021년 6월 김법민 단장을 필두로 이오플로우 전문 자문단을 꾸리고, 임상시험수탁기관(CRO)과의 일대일 대면 컨설팅을 주선했다. 식약처 인허가를 받는 과정을 사전에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였다. 사업단은 2021년 8월 규제기관 전담 데스크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오플로우에 한국보건의료원과 연계한 ‘신의료기술평가’ 자문을 제공했고, 식약처 R&D 코디 프로그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주선했다.
올해 2월에는 이오플로우의 연구성과를 점검했고, 5월엔 인허가 규제 대응 세미나도 열었다. 이오플로우 김재진 대표는 “범부처사업단이 제품화와 상업화에 성공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줬다”며 “사업단이 없었다면 다양한 이슈를 극복해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초 R&D에서 규제 혁파까지 지원
범부처 사업단은 세계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국산 의료기기가 사장되는 현실을 바꾸고자 각 부처가 의기투합해 만든 사업단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0년부터 오는 2025년까지 1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다.
산업을 육성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기술 개발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과학 R&D 자금 지원과, 기초과학을 기술로 산업화하는 연구 지원, 마지막이 산업화에서 상업화에 이르는 규제 개혁이다. 기초과학은 과기부가, 중개연구는 산자부에서 주도적으로 R&D를 지원했다.
산업부의 적극적인 R&D 지원 덕분에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했다. 10 년 전까지만 해도 국산 의료기기는 다국적 제조사의 제품을 복제하는, 즉 ‘미투’에 그쳤으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코로나19를 계기로 SD바이오센서, 씨젠, 바이오니아 등 한국 체외 진단 의료기기의 우수성이 전 세계에 각인됐다.
그런데 산업화에서 상업화로 가는 ‘규제’ 길목을 넘기가 어려웠다. 김법민 단장은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긴 했는데, 이 제품을 사람들에게 쓰이게 하는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산 의료기기가 개발에 성공해 시장에 출시되는 비율은 15%, 성공하는 비율은 1%가 채 안된다.
◇ “韓 의료기기 추진 엔진 달고 세계로”
범부처사업단이 10대 과제로 선정한 국내 의료기기 강소 기업들은 사업단의 연구개발 지원은 물론이고 규제 기관 협력 사업을 ‘최고의 서비스’로 꼽았다. 복지부는 규제 혁파를 담당했다. 사업단은 복지부 식약처와 손잡고 의료기기 산업 규제의 틀을 만들고 효율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김 단장은 정부의 R&D 지원 사업의 역할이 ‘마중물’이라면 규제 개혁은 ‘추진 엔진’이라고 봤다.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승자독식’이 작동하는 분야다. 의료기기와 의약품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안전성’ 데이터를 쌓을수록 더 많이 쓰이고, 또 더 널리 쓰인다. 한국은 단일보험체계이기 때문에 건강보험체계에 들어가야 사람들이 사용한다. 그래야 임상 데이터를 쌓아 나가면서 해외로 진출이 가능한데, 그동안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단장은 “한국 기업들은 제조에 있어서는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김 단장은 다만 “문제는 속도”라며 “헬스케어 산업을 육성하려면, 의료기기 업체들이 리얼월드 데이터(실제 현장에서 사용되면서 쌓이는 임상 근거)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혜를 모은다면 한국 의료기기 산업이 이스라엘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