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태평양간암전문가대회(아⋅태간암학회)’에서는 로슈와 에자이, 아스트라제네카 등 외국계 제약사 부스를 찾는 의학계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아⋅태간암학회는 외과, 내과, 병리과, 영상의학과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간암’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모이는 자리다. 전 세계 간암의 80%가 아⋅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을 고민한 한⋅중⋅일 의료진들이 주축으로 2010년 창립했다.
간암 치료제는 물론 B형과 C형 간염 치료제를 만드는 제약사에게 이 학회는 일명 ‘격전지’로 통한다. 아⋅태간암학회 행사는 지난 2021년과 2022년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비대면으로 열렸고, 올해는 3년 만에 대면 행사로 개최했다. 지난 2018년과 비교하면 규모가 줄었지만, 올해 행사에 660명 넘게 참석했다. 일본과 중국을 포함해 외국인 참석자만 221명에 달했다.
호텔 로비에서 5층 행사장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에는 영어와 중국어가 들렸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김도영 교수는 “한국의 간암 학문 수준은 세계적”이라며 “중국인 참석자가 한 때 200명을 육박할 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행사의 트렌드를 묻는 질문에 대회장을 맡은 연세대 의대 병리학과 박영년 교수는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답했다. 박 교수는 “10년 전만 해도 간암을 치료할 수 있는 항암제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 신약이 많이 나왔다”고 설명했고, 진단에 있어서도 간암을 분자로 분류해 치료를 세분화하는 방법이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간암은 간세포에 생긴 악성종양이다. B형 간염이나 C형 간염 지방간 같은 만성 간 질환 때문에 발생한다. 간암 발병 원인의 70%는 B형 간염이지만, B형 간염 백신이 개발돼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다. 간암 치료는 크게 수술과 비(非)수술로 나뉜다. 아시아에서는 간 절제를 주로 하고, 서구에서는 간 이식을 주로 한다. 간은 재생 능력이 뛰어나 20~30%만 남아 있어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다만 간 건강 상태가 좋지 않거나 고령일 경우, 항암 치료·고주파 열 치료·색전술 등을 통해 암의 크기를 10㎝ 미만으로 줄인 후 암 덩어리를 절제한다. 간문맥 색전술을 통해 암 세포가 퍼져서 도려낼 간은 줄이고, 정상인 간의 크기는 늘렸다. 절제를 할 수 없을 만큼 암세포가 퍼진 경우에만 항암제를 썼다. 그런데 ‘면역항암제’가 나오면서 이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 같은 변화는 메인 강연이 열리는 그랜드볼룸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행사장 출입구 정면에 로슈와 아스트라제네카 부스가 자리를 잡았다. 두 회사는 간암 1차 치료제로 쓰이는 면역항암제를 개발한 글로벌 제약사다. 3~4년 전만 해도 이 자리는 간암 표적항암제인 넥사바를 개발하는 ‘바이엘’과 색전술에 쓰이는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의료기기 업체인 메드트로닉이 차지했다.
로슈는 면역항암제인 티센트릭(성분명 아테졸리무맙)과 아바스틴(베바시주맙)을 갖고 있다. 간 절제 수술을 할 수 없는 진행성 간암 환자에게 두 약을 함께 투여하는 병용요법을 쓴다. 이 치료법은 두 약은 미국 FDA(식품의약국)로부터 지난 2020년 1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고, 한국도 2021년부터 쓰이고 있다.
여기에 도전장을 낸 것이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임핀지(성분명 더발루맙) 이뮤도(성분명 트레멜리무맙)다. 임핀지와 이뮤도는 올해 초 미국 FDA허가에 이어 지난달 식약처로부터 간암 1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진행성 간암 환자의 5년 생존률은 7%에 불과했는데, 최근 임상시험에서 임핀지 이뮤도를 투여한 진행성 간암 환자의 4년 생존률은 25%에 달했다.
서울아산병원 김강모 교수는 “복수의 면역항암제를 병용해서 상요하는 이른바 ‘이중 면역항암요법’이라는 치료가 등장하면서 간암 치료에서 새로운 옵션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다만 가격이 비싼 것이 부담이 된다”고 덧붙였다. 로슈의 티센트릭과 아바스틴은 건보 적용을 받지만, 아스트라제네카의 임핀지 이뮤도는 아직 건보에 등재되지 않았다.
이날 학회에서는 간암이 발병한 후에 치료할 것이 아니라, B형 간염을 확실히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B형 간염을 앓은 사람 가운데 간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진 사람은 20%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대상으로 조기 선제 치료를 한다면 간암의 리스크를 훨씬 줄일 수있다는 계산이다. C형 간염을 앓고 있는 간암 환자에게 C형 간염 치료제를 쓸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