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발달장애를 겪는 영유아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시기에 영유아기를 보낸 3명 중 1명은 발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이들이 대체로 집에 머물며 또래와 지내는 시간이 줄면서 사회적 관계가 제한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0~7세에 해당하는 영유아기는 발달에 가장 중요한 시기다. 이때 활발히 이뤄지는 발달이 간혹 조금 늦어지는 경우는 있다. 다만 제때 발견하지 못하고 치료 시기를 놓치면 자폐스펙트럼장애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같은 발달장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디지털치료제 개발회사 루먼랩 임재현 대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바이오·뇌공학을 전공한 뒤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과학자다. 임 대표는 의사면허(MD)와 박사학위(PhD)를 둘 다 가지고 있다.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 루먼랩 서울지사에서 만난 임 대표는 “병원에는 이미 뛰어난 의사들이 많이 있으니 병원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병원의 임상 현장을 경험하며 뇌 질환은 일찍 알수록 대응이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영유아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2021년 7월 아동 발달장애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하는 루먼랩을 창업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9세 이하 지적, 언어, 자폐스펙트럼장애 등록 인구는 2만3000명 이상으로 집계됐다. 해당 통계에서 포함하지 않는 9세 이하 ADHD 환자도 2만4000명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지역적 격차와 전문가 부족으로 제때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치료 비용도 월평균 300만원에 달해 치료에 엄두를 내기 어려운 환자들이 많다.
임 대표는 “국내에서 영유아의 발달상태와 정신건강을 진단 받으려면 수도권의 대학병원이나 전문 센터를 찾아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며 “설령 검사 등록을 해도 대기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유아기 발달 문제는 생활 습관이 가장 중요한 만큼 집에서 쉽고 빠르게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루먼랩은 인공지능(AI) 영상 분석 기반 영유아 발달지연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솔루션 ‘굿비기닝’을 개발했다. 또 이 솔루션을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발달 평가 앱(응용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만 12~36개월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앱인 ‘엘턴’은 스마트폰으로 아이의 행동을 촬영하고 설문을 조사를 받게 하면 AI가 발달 상태를 평가해준다. 기존 발달 평가 프로그램은 평가에만 2~3시간이 걸리지만 이 앱은 5~10분 만에 간단하게 검사 결과를 알려준다.
루먼랩은 최근 정부가 지원하는 디지털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의료기관이 영유아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는 과정을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9월부터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영유아를 대상으로 서울대 연구진과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세종 충남대병원과는 AI 기반 디지털 표현형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디지털치료제의 임상 검증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향후 아동 ADHD와 수면장애로도 적용 대상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루먼랩은 서울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세종 충남대병원과 협력해 데이터도 확보했다.
임 대표는 “자폐나 발달 장애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의료기관에서 하던 프로토콜을 디지털화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며 “영유아가 발달 지연으로 겪을 질환을 하나하나 연구해 치료제개발에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의사과학자로서 스타트업을 창업한 계기는 무엇인가.
“KAIST를 다닐 때부터 막연히 창업을 꿈꿨다. 연구보다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임상을 더 배우기 위해 졸업 후 의학전문대학원을 택했다. 현장에서 치매나 어린 아이들의 발달장애 같은 뇌질환 환자를 많이 봤는데, 생활습관이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실력 좋은 의사들이 많아서 병원 밖에서 환자의 생활습관을 미리 알고 대응하는 기술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아동 발달장애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KAIST나 의전원에서 치매 관련 연구를 많이 했는데, 발달장애 문제를 겪는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조기에 발견하면 발달장애를 막을 수 있다. 네 살배기 딸을 보며 이 시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기존 아동 발달장애 진단·치료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우선 병원이나 센터를 방문해 2~3시간 정도 평가를 거쳐 진단을 받아야 한다. 이후 발달장애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인 응용행동분석(ABA) 방식으로 치료가 이뤄진다. 문제는 의료기관과 센터가 수도권에 밀집돼 있어서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자폐 진단을 받기 위해 소아정신과 대기가 3~5년 걸려 있다고 한다. 문제행동 교정 전문 센터 수도 적다. 치료사 수도 적고 비용도 높기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는 아동 비율은 굉장히 낮다.”
-루먼랩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
“의료기관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쉽게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시설에서 잠깐 보여지는 행동보다 일상에서의 행동 데이터가 쌓이면 진단과 치료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부모와 아이가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디지털 치료제를 제공해 진단을 받고, 기본적인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꾸준한 치료 환경을 만드는 게 디지털 치료제의 목적이다. 다만 병원과 의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전문가 치료와 병행했을 때 치료가 극대화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나.
“ABA(응용행동분석) 기반의 발달지연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아이들은 월령별로 발달 차이가 크다. 24개월인데 문장을 구사하는 아이도 있고, 단어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아이들 발달 수준에 맞춰서 콘텐츠를제공해야 진단도 치료도 정확해진다. 우리는 0~3세 아이들의 발달 월령에 맞춘 디지털 콘텐츠로 발달 수준을 평가한다. AI로 아이들의 문제 행동의 원인을 찾고, 치료 계획을 설계하면 아동의 일일행동을 기록하며 개선 훈련하는 방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쉽게 말하면 아이들에게 알람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지시를 하는 것이다. 불면증을 치료할 때 생활습관 교정을 위해 수면 패턴을 조정하는 인지행동치료(CBT)와 비슷하다. 그걸 아동 발달지연 치료에 적용하는 것이다.”
-현재 개발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작년 9월부터 서울대 연구팀과 자폐나 발달지연 아동을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 루먼랩의 디지털치료제가 아이의 자해나 공격적인 행동 같은 문제 행동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교정하는지 알아보는 연구다. 중간결과는 올 가을쯤 예상하고 있다. 이후엔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위한 임상, 확증임상까지 진행해야 해서 최종 인허가를 받으려면 3년 정도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나.
“디지털치료제 분야 전문가이신 고려대 안암병원 조철현 교수님과 함께 진행한 연구를 통해 아동 ADHD와 불면증을 진단할 수 있고 치료 가능성도 확인했다. ADHD와 불면증 치료 기술도 개발 중이다. 루먼랩이 출생률이 가장 높은 세종시에 본사를 둔 이유는 영유아 임상 데이터가 많아서다. 현재 세종시에서 여러 연구과제를 진행 중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어떻게 구현되나.
“핏빗(Fitbit)이라는 기존 웨어러블 기기로 구현할 계획인데, 웬만하면 모든 스마트폰에서 누구나 사용이 가능하도록 해 접근성을 최대한 낮추려고 한다.
-임 대표의 목표는 무엇인가.
“회사의 메인 테마는 ‘아동 발달’이다. 질환보다는 0~7세 영유아에 집중해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발달 관련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솔루션 개발을 해나갈 것이다.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만큼 임상적으로 얼마나 유효한지를 검증하고 시장에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