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철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바이오PD(프로그램 디렉터)가 4일 서울 여의도 신한투자증권에서 열린 '마이크로바이옴 산업 세미나'에서 마이크로바이옴 산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정부가 질병 치료와 노화 개선 효과가 입증되며 큰 시장으로 떠오른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패권을 잡기 위한 기술 발굴에 나선다.

김형철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바이오PD(프로그램 디렉터)는 4일 서울 여의도 신한투자증권에서 열린 '마이크로바이옴 산업 세미나'에서 "인체질환 극복 마이크로바이옴 기술개발사업(가칭)을 통해 오는 2025년부터 2032년까지 총 8년 동안 4000억원 내외로 지원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장내 세균 전체를 뜻하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은 미생물(microbe)과 바이옴(biome)의 합성어로 '제2의 인간 게놈'으로 불리고 있다. 사람의 장(腸)에는 100조개가 넘는 세균이 산다. 사람 세포보다 10배나 많다. 최근 과학자들은 암이나 당뇨, 비만이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 군집이 붕괴하고 해로운 장내 세균이 득세하면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잇달아 찾아냈다. 자폐증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도 장내 세균의 균형이 무너진 탓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화이자와 존슨앤드존슨(J&J) 등 세계적인 제약사들은 이런 이유로 바이오 벤처와 손잡고 장내 세균을 이용한 질병 치료제 개발에 나서고 있다.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을 주입하거나 이 세균들을 돕고 나쁜 세균은 억제하는 방식으로 당뇨병과 비만, 감염성 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화이자는 지난 5월 샌프란시스코의 바이오벤처인 세컨드 지노믹스(Second Genomics)사와 손을 잡고 900명의 장내 세균을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1위 제약사인 미국의 존슨앤드존슨이 보스턴의 바이오벤처인 베단타 바이오사이언시스(Vedanta Biosciences)와 장내 세균을 이용한 감염성 장염과 자가면역 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정부가 4000억원 규모 예산으로 계획 중인 마이크로바이옴 기술개발사업. /김양혁 기자

이날 공개된 인체질환 극복 마이크로바이옴 기술개발사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질병관리청 등 범부처가 참여하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데이터 구축을 토대로 전임상 기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임상과 제품화를 연구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해 총 1조원 규모를 투입한 '국가마이크로바이옴 이니셔티브'를 통해 마이크로바이옴 산업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서 지원 사업 범위가 넓어 예산 지원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예비타당성조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김 PD는 "이번 사업은 '인체'로 타깃을 특정해 치료와 진단 분야에 대해 추진할 계획인 만큼 예타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영진 산업부 바이오융합산업과장도 "정부는 마이크로바이옴 산업에 대한 투자가 마중물 역할로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국내 산업이 선진국과 기술격차를 좁히고 새로운 신성장 사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이크로바이옴 업계 안팎에서는 올해 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 식품의약국(FDA)이 스위스 페링파마슈티컬이 개발한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에 대응한 마이크로바이움 치료제 '레비요타'를 허가한 데 이어 올해 4월 미국 세레스테라퓨틱스가 개발 중인 치료제 역시 FDA 허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레비요타가 직장을 통해 투약한다면 세레스테라퓨틱스의 치료제는 먹는 약으로 편의성을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은 아직은 시작 단계이고 한동안 시장 규모가 작겠지만 향후 호흡기는 물론, 피부건강과 정신질환 등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따르면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시장은 올해 2억6980만달러에서 연평균 30% 이상 성장해 오는 2029년 13억7000만달러(약 1조8000억원)로 전망된다.

이광준 질병청 국립보건연구원 인수공통감염연구과장은 "만성적 질환은 미해결 질환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지만, 질병 타깃이 되는 환경, 생활습관과 마이크로바이옴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질병의 한계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지수 지놈앤컴퍼니 대표이사는 "후발주자라도 열심히 투자하고 연구하면 글로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며 "마이크로바이옴은 여전히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배지수 지놈앤컴퍼니 대표이사가 4일 서울 여의도 신한투자증권에서 열린 '마이크로바이옴 산업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