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 애써 일한 사람은 따로 있고, 그 일에서 나오는 이득은 다른 사람이 얻는다는 뜻이다. 이런 속담같은 일이 국내 백신업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재주를 부린 곰은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가 개발하고 GC녹십자가 유통하는 대상포진 백신 ‘싱그릭스’이고, 그 덕에 돈을 번 곳은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가 개발한 국산 백신 ‘스카이조스터’다.
28일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국내 대상포진 시장점유율 1위는 스카이조스터(6만 4893도스, 57%)로 나타났다. 2위는 MSD가 개발한 조스타박스(4만6427도스, 41%), 3위는 싱그릭스(2021도스, 2%)였다. 지난해 3분기까지 국내에서 접종 가능한 대상포진 백신은 스카이조스터와 조스타박스 둘이었는데, 싱그릭스가 지난해 12월 국내 출시하면서 셋으로 늘었다.
대상포진은 수두 바이러스가 몸 속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활성화되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겨 피부 질환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극심한 신경통을 동반한 고통스러운 질병이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50대부터 발병해서 백신 접종이 권고된다.
싱그릭스는 ‘90%’ 예방효과로 유명한 차세대 백신이다. 조스타박스와 스카이조스터는 대상포진 바이러스의 위력을 약하게 만들어서 주사하는 생(生)백신으로 예방효과가 70% 수준이다. 싱그릭스는 바이러스의 일부 단백질을 떼어내 만든 사(死) 백신인데, 강한 면역반응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항원보강제(AS01B)를 결합해 효과가 뛰어나다.
이런 예방 효과 덕분에 미국에서는 지난 2017년 허가출신된 이후, 시장을 휩쓸었다. 국내에서도 싱그릭스의 국내 출시 여부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받았다. 싱그릭스가 도입되면 가장 먼저 대상포진 백신을 맞겠다는 의사들도 있었다.싱그릭스 국내 판권을 두고 국내 제약사의 입찰경쟁도 치열했다.
GSK는 국내 최대 백신 유통망을 갖고 있는 GC녹십자 등과 손잡았다. 작년 11월부터는 배우 마동석을 광고 모델로 한 ‘당신도 대상포진 대상자’라는 TV광고를 방영했다. 이 광고의 유튜브 누적 조회수는 799만회로 코웨이가 방탄소년단을 모델로 찍은 공기청정기 광고의 유튜브 조회수(800만회)를 육박한다.
그런데 싱그릭스 국내 출시 첫 달 실적은 2021도스에 그쳤다. 반대로 경쟁 제품인 스카이조스터의 판매량은 지난해 1분기 4만 4840도스에서 지난해 4분기 6만 4893도스로 45%가 급증했다. 이러니 업계에서는 마동석이 출연한 대상포진 광고가 오히려 SK바이오사이언스 좋은 일 시킨다는 얘기가 나온다.
가격이 가장 큰 변수였다. 싱그릭스는 2개월 간격으로 2번 접종하는 방식의 백신인데, 1회 접종비가 25만~30만원에 이르는 초고가 프리미엄 백신이다. 조스타박스와 스카이조스터의 가격은 15만~20만원 선으로 다른 백신들과 비교하면 비싼 편이지만, 싱그릭스에는 비교할 수가 없다.
국내 병원의 한 관계자는 “GSK의 대상포진 인식 제고 광고를 보고 대상포진 백신을 문의하러 왔다가, 접종 가격을 듣고서 스카이조스터 등을 접종한 경우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접종비를 고려하면 싱그릭스와 비교해 기존 백신이 가성비가 훨씬 뛰어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개원의들 사이에서도 “싱그릭스의 예방률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50만~60만원은 병원 입장에서 접종을 권할 수 없는 가격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싱그릭스가 2~6개월 간격으로 총 2회 근육주사로 접종해야 한다는 점도 심리적 장벽이 됐다. 조스타박스와 스카이조스터는 한 번만 접종하면 된다. 큰 마음을 먹고 백신을 접종하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두 번 접종은 번거로울 수 있다.
의료계에서는 “싱그릭스가 코로나19 백신이 끝난 백신시장에서 대상포진 백신으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맞지만, 마케팅이나 물량 조달 같은 기업 경영 측면에서는 SK바이오사이언스가 한 수(手) 위”라는 말도 나온다. SK바이오는 싱그릭스 국내 출시에 맞춰서 ‘저렴한 가격에 국산 백신’이라는 장점을 내세워서 공격적 마케팅에 들어갔다.
GSK관계자는 “싱그릭스는 지난 12월 중순 국내 판매를 시작해 성과를 판단하기에 이른 감이 있다”라며 “싱그릭스가 출시된 해외 시장에서는 우월한 효과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상포진은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떨어지면 발병하기 때문에, 고령화가 진행될 수록 백신 시장은 커질 전망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 48만 명이던 국내 대상포진 환자 수는 10년 만인 2020년 72만 명으로 약 1.5배 늘었다.
국내 대상포진 백신 시장은 2017년까지 MSD의 ‘조스타박스’가 독점했으나, 그 해 SK바이오사이언스가 ‘스카이조스터’를 출시하면서 독점 구조가 깨졌고, 지난해부터는 스카이조스터의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조스타박스를 밀어냈다. 스카이조스터가 조스타박스보다 1만~2만원 가량 저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