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z, allez, allez(빨리, 빨리, 빨리)!”
지난 7일(현지 시각) 오전 10시 스위스 바젤 유로에어포트 한쪽 물류창고에선 노란색 형광조끼를 입은 서너 명 직원들이 창고 안을 분주히 오갔다. 화물을 옳길 때 사용하는 받침대인 팔레트 위에 놓인 가로 180㎝, 세로 150㎝ 정도 큰 박스에 포장을 씌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흰 포장 위엔 ‘콜드체인 테크놀로지’라는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바젤의 관문인 유로에어포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콜드체인 시스템을 갖고 있는 공항이다. 콜드체인은 저온 유통체계라는 뜻으로 냉동·냉장 상태가 유지되는 신선한 식료품의 유통방식이다. 백신과 치료제 등 의약품의 냉동과 냉장 유통과정도 포함한다.
창고 직원들이 박스에 씌운 흰 포장은 콜드체인에서 유통되도록 제작된 방수포였다. 이 방수포로 포장하면 냉동·냉장 시설에 장기간 놔둬도 박스가 물에 젖지 않고 약 성분에 변질이 일어나지 않는다.
◇ 고가 치료제 운송에 집중…수출 실적에 큰 도움
유로에어포트에는 총 7개의 물류창고가 있다. 각각의 창고마다 네 곳의 냉장·냉동 보관시설이 있다. 상온(15~25도) 보관용 한 곳, 냉장(2~8도) 보관용 두 곳, 냉동(영하 20도 이하) 보관용 한 곳이다. 온도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이날 콜드체인 시설을 공개한 공항 측은 설명했다.
약 종류에 따른 적정 온도에서 보관되던 약들은 비행기에 실리기 전 한번 더 포장 절차를 거친다. 온도 유지를 위해 특수 제작된 컨테이너로 옮겨진다. 약은 다시 화물기에 실려져 유럽은 물론 아시아, 남북미 대륙, 아프리카까지 운송된다. 이날 출하분은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베트남, 미얀마, 뉴질랜드로 배송될 예정이다.
공항 관계자들은 이날 출하되는 제품은 노바티스 졸겐스마, 로슈 케싸일라 등으로, 적게는 수 천만원, 많게는 수 억원에 이르는 고가 치료제들이라고 소개했다. 졸겐스마는 주사 한 번 맞는 가격이 20억원에 달하는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다. 유방암 치료제인 케싸일라는 3주에 한 번 14회 주사해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만 1억원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다.
마침 이날은 일주일 중 가장 많은 의약품이 들어오고 나가는 금요일이었다. 한 번에 최대 20t까지 의약품을 싣는 항공기들이 주말 동안 세계 각지로 의약품을 배송한다. 공항의 물류 책임자인 파브리지오 리카 씨는 “금요일은 항공기 한 대가 실어나르는 약값이 족히 수십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쉰 유로에어포트 에어라인 디벨롭먼트 부문 부사장은 “비싼 약일수록 외부 환경에 민감한 성분을 쓰기 때문에 공장, 물류창고, 비행기, 병원까지 적정 온도를 철저히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유럽에서 생산된 고가 치료제는 대부분 유로에어포트를 통해 수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항에 콜드체인 시설이 들어서면서 수출 실적도 올라가고 있다. 2020년 유로에어포트를 통해 1만6747t의 의약품이 해외로 출하됐는데 2021년에는 그 처리량이 1만9756t로 18%나 늘었다. 지난해 스위스 수출품의 15%가 유로에어포트를 통해 수출된 셈이다. 항공 운송을 통한 수출액만 따지면 유로에어포트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 유럽 대륙 중심에서 물류의 중심으로
바젤 공항에 콜드체인 시설이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유로에어포트 관계자들은 지정학적 요인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바젤은 유럽 대륙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중세부터 수많은 물건들이 오가고 거래가 이뤄지는 ‘무역 허브’ 기능을 해왔는데, 그런 역사적 특징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바젤이 작은 도시라는 점도 득이 됐다. 도시 면적이 약 23㎢인데, 서울 마포구와 비슷한 규모다. 노바티스, 로슈 같은 글로벌 대형 제약사를 포함해 700개 넘는 제약바이오 기업이 모여 산업단지(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도로 정비가 잘 돼있고 공항도 있어 인프라 응집도가 높다. 기업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실어나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 운송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유로에어포트는 공항 물류창고에서 비행기로 의약품을 옮기는 시간마저 줄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규모가 커서 화물을 대량으로 처리하기 용이하지만 화물을 싣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항공기와 물류창고 사이 거리가 멀어서 물건을 적재하는데 보통 45~60분가량 걸리고 있다.
반면 유로에어포트는 공항 규모가 작아 물류창고와 항공기 주기장 사이 거리가 짧다. 공항 측은 물건을 싣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공항에 이착륙하는 항공기 수도 유럽의 다른 국제공항에 비해 적어, 화물을 다 싣고도 이륙 순서를 기다리느라 낭비하는 시간도 적다.
쉰 부사장은 “기업 입장에서 시간은 곧 돈”이라면서 “스위스 정부는 공항에 물류창고를 지을 때부터 부지를 세심하게 고르고 공항 내 항공기 동선을 설정할 때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 두 국가 동거 덕분에 24시간 운영 가능해
유로에어포트의 또 다른 특징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다국적 공항’이라는 점이다. 공항 일부 부지는 프랑스 영토인데 콜드체인 물류창고 7곳 중 2곳도 프랑스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공항 한 곳을 스위스와 프랑스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입장에선 이런 관리 방식이 상당한 이득이 되고 있다. 두 국가의 노동법이 다른데 트럭 운전의 경우, 스위스는 탄소 중립을 위해 오후 10시 이후로는 트럭을 운행하지 못한다. 반면 프랑스는 이런 규정이 없어 24시간 운행이 가능하다.
결국 두 나라가 공항 물류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 덕분에 오후 10시 이후에도 유로에어포트는 프랑스 측 트럭을 통해 밤 중에 물류창고를 채우고 다음 날 아침에 곧바로 출고하는 체계를 유지하고 됐다. 24시간 내내 효율적인 물류 운영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