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의료원 재활병원 뒷편에 약 3000억원을 들여 건축한 중입자치료센터가 처음 공개됐다. 지하 4층 지상 9층 높이로 지은 이 센터 지하에는 건강한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 없애서 ‘꿈의 치료기’로 불리는 중입자 치료기가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중입자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이곳에 설치된 중입자치료기는 국내에선 최초이고 독일 일본 중국에 이어 전세계에서 16번째로 도입됐다.
암을 치료하는 방법은 크게 수술, 항암제 투약, 방사선으로 나뉜다.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에 방사선을 쏴 암세포를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중입자 치료는 말 그대로 ‘무거운 입자’인 탄소로 하는 치료다. 탄소 입자를 빛의 속도 70%까지 빠르게 돌려서 생긴 에너지를 암세포에 쏘아서 파괴하게 된다.
기존의 방사선 치료인 감마선(감마나이프)이나 양성자(수소 입자) 치료와 비교하면, 탄소 입자는 12배(수소입자) 이상 무겁기 때문에 파괴력이 2~3배 강력하고, 에너지를 한 지점에만 모아서 터뜨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줄로 나열된 10개 풍선 가운데 7번째 풍선이 암세포라면, 기존의 방사선 치료로는 7개 풍선을 모두 터뜨려야 했다면, 중입자 치료로는 7번째 풍선만 터뜨릴 수 있는 식이다.
이 때문에 중입자치료기는 암 세포 주변의 건강한 세포를 손상할 우려로 수술이 어렵던 난치 고형암을 치료할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컨대 사람의 눈 코 입을 주위로 얼굴 안쪽에 생긴 암을 ‘두경부암’이라고 부른다. 입 안 쪽에 암세포가 생기면 구강암, 편도에 생기면 구인두암(편도암), 갑상샘에 생긴 암은 갑상선암이 된다. 편도암이나 구강암은 수술로 제거할 수 있지만, 눈 뒤쪽에 생긴 종양은 사정이 다르다.
눈과 머리가 있는 부위는 뇌와 혈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암세포를 제거하려면 안구를 적출해야 한다.이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거나, 중입자치료가 가능한 일본과 독일로 ‘해외 원정 치료’를 떠났다. 한번에 1억~3억원의 비용이 들지만, 집 팔고 전세금을 빼서 떠나는 환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난치암 환자들이 국내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내년이면 열린다.
◇ 꿈의 암 치료기 ‘중입자 치료센터’ 내년 개관
센터의 지하 50m 아래의 4층에는 탄소 입자 가속기가 위치했다. 배구장 두 개 면적에 탄소를 모아 두는 노란색 원자로를 중심으로 탄소 입자를 회전시키는 푸른색, 연두색의 엑셀러레이터(가속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정확한 온도와 습도 유지를 위해 실내 공기 순환기가 쉬지 않고 가동된 가운데, 푸른색 가속기 마다제조사인 ‘도시바(Toshiba)’ 로고가 찍혀 있었다.
병원 내부 시설로는 크기가 압도적이었지만, 김용배 연세암병원 부원장은 “독일이나 일본에 있는 중입자 치료기 가속기와 비교하면 컴팩트한 사이즈다”라고 말했다. 김 부원장에 따르면 1세대 중입자 치료기의 가속기가 축구 경기장 만하다고 한다. 그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배구장 두 개 면적 정도로 크기가 오히려 줄었다”라고 설명했다.
지하 4층에 있는 가속기에서 나온 탄소 입자 에너지는 지하 2층에 있는 치료실에서 환자 치료에 쓰인다. 연세의료원이 도입한 치료기는 고정형 1대와 회전형(겐트리) 2대인데, 상대적으로 설치가 간단한 고정형은 이미 완비가 된 상태였다. 고정형은 중입자 치료기는 왼쪽 벽에 고정해 두고, 침대를 움직여 환자의 환부에 에너지빔을 쏘는 구조다.
◇ “내년 3월 전립선암 환자 첫 치료 전망”
이익재 연세암병원 중입자치료센터장은 “내년 3월 쯤 고정형 치료기를 일반에 먼저 공개할 텐데 아무래도 전립선암 환자가 첫 치료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중입자 치료기는 세포 살생력이 다른 치료에 비해 막대하기 때문에 오작동 등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장기에 있는 종양이 제거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대장암과 같이 움직이는 장기에 있는 암보다는 인체 외부에 움직이지 않는 장기에 있는 종양이 조준이 용이하다. 고정형 치료기의 경우 암세포에 따라 환자를 위치를 이동시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누워있는 상태에서 방사선 조사가 용이한 전립선이 주 대상이 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결국 이는 췌장암이나 골육종 같은 난치성 암환자는 회전형 겐트리가 상용화되는 내년 연말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날 중입자 치료기가 직접 움직여서 환자를 치료하는 회전형 치료기는 설치가 한창이었다. 회전형은 거대한 원통형 치료기 안에 환자 침대가 들어가고, 원통에 부착된 기기가 회전하면서 암 세포를 타격한다.
회전형 치료기의 원통은 높이는 5m, 직경 8m로 거대한 댐의 수도관처럼 보였다. 이익재 센터장은 “이것 역시 독일이나 일본에서 쓰인 옛 모델과 비교하면 절반 정도 크기로 줄인 것이다”라며 “일본에 올해 도입된 최신 제품과 모델이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이 모델을 보려고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도 최근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 “췌장암 폐암 간암 생존률 2배 이상 끌어올릴 것”
병원 측은 회전형 중입자 치료기가 가동을 시작하면 혈액암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형암 치료에 쓸 계획이다. 특히 수술로 치료가 어려운 악성 종양에 효과를 보이기 때문에 재발성 난치암에 효과적이다. 산소가 부족해도 살아남는 저산소 암세포는 생명력이 강해서 수술로 제거해도 또 다시 재발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중입자는 암세포 DNA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완벽한 제거가 가능하다고 한다.
환자 편의성을 높인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중입자 치료의 환자 한 명당 치료 시간은 2분 정도다. 침대에 눕고, 치료기를 가동하는 준비 과정까지 포함해도 20분 정도면 1회 치료가 끝난다. 또 치료 후 환자가 느끼는 통증이 거의 없어 치료 즉시 귀가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을 토대로 치료기 3대로 하루 약 50여명의 환자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 병원 측 설명이다.
윤동섭 연세대 의료원장은 “중입자치료는 골∙연부조직 육종, 척삭종, 악성 흑색종 등의 희귀암의 치료에도 쓰일 수 있다”며 “실제 일본의 많은 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세의료원에 따르면 췌장암, 폐암, 간암은 5년 생존율이 30% 이하여서 3대 난치암이라고 꼽히는데 생존율을 2배 이상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평균 치료 비용은 3000만~5000만원선이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다만 김용배 부원장은 “의료기기는 가동 전에 식약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비용 문제는 건강보험공단의 급여 등록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에 (허가를 받기 전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최진섭 연세암병원 원장은 “연세의료원은 1922년 국내 최초로 방사선치료를 시작했고, 1969년 국내 최초의 암센터를 개원했다”라며 “이번 중입자치료기 도입으로 대한민국 암치료의 역사를 이끌어 온 연세의료원이 항암 치료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