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한승현 로완 대표의 휴대전화로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의대 질 리빙스턴 정신과 교수이었다. 리빙스턴 교수는 지난 1998년부터 랜싯 등 주요 국제학술지에 논문 300여편을 실어 온 정신과 분야에서 세계적 연구자로 불린다. 리빙스턴 교수의 논문은 지난 25년간 6만1000번 이상 인용됐다.
리빙스턴 교수는 통화에서 “로완이 개발한 인지중재치료용 소프트웨어 ‘슈퍼브레인’을 영국 환자에게 써보겠다”고 말했다. 영국 국립보건연구원(NHIR)의 예산을 지원받아 임상을 진행할 계획인데 이 시험에서 슈퍼브레인 제품을 이름과 함께 쓰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전했다. 인지중재치료란 학습지 풀기, 운동 같은 뇌에 자극을 주는 일상적 방법으로 인지능력을 개선하는 신개념 치료 방법이다.
기존에는 인지능력 개선을 위해 제작한 학습지를 치매 환자에게 나눠주고, 의료진이 환자 옆에 붙어 문제풀이를 돕는 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치매 환자를 모을 공간과 이들을 장시간 돌봐줄 인력이 필요하다보니 병원들에겐 오랜 기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어려웠다.
한 대표는 병원이 아닌 노인 복지관, 집에서 환자가 의료진 도움 없이 스스로 인지중재치료를 받도록 돕는 소프트웨어를 떠올렸다. 한 대표는 2017년 로완을 설립해 인지중재치료에서 학습지 풀이 과정을 대체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2018년에는 인지중재치료용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정부 과제를 따냈다.
로완은 치매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고혈압, 당뇨 같은 질환이 있거나 치매 바로 직전 단계인 경도 인지장애를 앓는 고령(60세 이상)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환자를 기관 치료군(복지관에서 슈퍼브레인 사용하는 그룹)과 재택 치료군(집에서 사용하는 그룹), 대조군(치료를 받지 않은 그룹)에 50명씩 배치해 나눈 뒤 15개월 후 인지능력을 확인했다.
그 결과 복지관이나 집에서 사용한 환자들은 15개월 전보다 인지능력이 개선됐다. 같은 기간 인지중재치료를 받지 않은 대조군은 인지능력이 떨어졌다. 슈퍼브레인 효과가 수치로 증명된 것이다. 최혜성 인하대 의대 신경과 교수가 주도한 이 연구는 노화 분야에서 저명한 국제학술지 ‘에이징(Aging·노화)’에 실렸다.
리빙스턴 교수도 이때 발표된 논문을 통해 슈퍼브레인을 알게 됐다. 그는 지난해 말 영국 정부에 슈퍼브레인 임상 신청서를 제출해 올해 4월 최종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슈퍼브레인은 영국 정부 지원을 받아 5년간 안정적으로 해외에서 임상을 진행하게 됐다. 다만 슈퍼브레인 브랜드를 그대로 쓸지는 아직 협상 중이다.
로완은 현재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 절차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리즈B 투자를 진행 중이다. FDA 승인을 받으려면 현지 대학병원들과 임상을 거쳐야 한다. 로완에 따르면 현재 하버드대 의대에서 슈퍼브레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로완은 내년 초쯤 FDA에 슈퍼브레인 허가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로완은 보험회사인 흥국생명, 밀키트 제조사 아워홈과 업무협약(MOU)을 맺고 사업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헬스케어 종사자들이 기술력을 강조하기 전에 먼저 돈을 버는 다양한 아이템을 발굴해야 산업 규모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대표를 지난 7일 서울 중구 연세 세브란스빌딩에서 만났다.
一 ‘인지중재치료’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달라.
“약물을 쓰지 않고 이뤄지는 인지장애 치료 방법이다. 기존에는 학습지가 주된 도구였다. 뇌에 지속적인 자극이 되는 간단한 문제들을 모아 학습지로 만들어 환자가 풀게 하는 식이다. 환자 옆에 의료진이나 복지관 직원이 반드시 붙어서 학습지 푸는 걸 지켜보고 환자 수준에 따라 학습지 난이도를 조정해야 했다.”
一 슈퍼브레인은 그 과정을 디지털화한 건데, 학습지를 쓰는 게 문제가 있었던 건가.
“학습지를 풀게 하고 환자를 지켜보며 일일이 난이도를 고쳐주는 프로그램은 병원으로선 부담이 크다. 장기간 유지하기 어렵다. 병원에 환자들을 모아둘 공간이 부족하고 학습지 푸는 걸 지켜볼 인력도 충분하지 않다. 병원도 결국 병원이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수익을 내야 살아남는다. 이미 최대한 효율적으로 병원 공간과 인력이 배정된 상황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인력이 필요한 학습지를 푸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낄 자리는 없었다.”
一 그렇다면 슈퍼브레인은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한 건가.
“슈퍼브레인은 소프트웨어다. 태블릿PC에 앱(애플리케이션)만 깔면 굳이 병원에 올 필요 없이 노인 복지관, 자택에서 환자가 언제든 혼자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성취도에 따라 커리큘럼이 알아서 맞춤 조정되기 때문에 누가 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병원에 공간과 인력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그렇게 극복할 수 있었다.”
一 슈퍼브레인이 인지능력을 개선해주는 건 확실한가.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에 팔 수가 없다. 인지능력에 장애가 생긴 환자의 기억력, 시공간구성력, 어휘력, 집중력 등을 평가하는 ‘RBANS(인지 능력 검사) 점수’라는 게 있다. 60세 이상 환자 150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15개월동안 꾸준히 슈퍼브레인을 사용한 환자들은 해당 점수가 평균 5점 넘게 올랐다. 반면 같은 기간 슈퍼브레인을 포함해 아무 치료도 받지 않은 환자들은 점수가 평균 1점 남짓 떨어졌다. 이는 굉장히 유의미한 결과다.”
一 연구 결과 기반으로 논문은 안 썼나.
“연구를 주도한 최성혜 인하대 의대 신경과 교수가 논문을 썼는데, 노화 분야 국제학술지인 ‘에이징(노화)’에 실리기도 했다. 에이징은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학술지로, 논문을 등재하기 위한 조건이 상당히 엄격하고 까다롭다.”
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이 실렸다면 파급효과도 있었을 텐데.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었다. 영국 UCL 의대 정신과에 질 리빙스턴이라는 교수가 있다. 논문만 300편 넘게 썼고 그중 일부는 란셋과 같은 세계 최고 학술지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 교수가 지난해 2월 먼저 우리 쪽에 전화를 걸었다. 에이징에 올라간 슈퍼브레인 논문을 보고는 자신도 슈퍼브레인을 영국 환자들에게 써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슈퍼브레인이 국제적 차원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였다.
一 임상은 진행 중인가.
“올해 4월 영국 국립보건연구원(NHIR)으로부터 임상을 진행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현재 임상에 참여할 환자를 모으고 있다. 앞으로 5년간 UCL 의대가 영국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슈퍼브레인 효과를 검증한다.”
一 FDA 허가 신청도 준비 중이라 들었다.
“내년 초에 신청을 넣는 걸로 일단은 계획 중이다. FDA 허가 절차에 쓸 자금 마련을 위해 시리즈B 투자를 진행 중이다. 투자는 잘 되고 있다. 이미 투자를 확정한 대형 자금운용사도 있다. 올해 말쯤 투자 유치가 끝날 것으로 예상 중이다.”
一 미국 의대 쪽에선 슈퍼브레인에 관심을 안 보이나.
“하버드 의대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FDA 허가를 받으려면 현지 임상을 진행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하버드 정도 되는 의료기관이 관심을 보이는 건 매우 고무적이다. 사업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다.”
一 ‘사업’이란 단어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얼마 전 흥국생명과 MOU를 맺었다.
“현재 인구 고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치매를 비롯한 인지장애 관련 보험은 거의 대부분 보장성이다. 쉽게 말해 치매에 걸리면 돈을 주는 방식이란 거다.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제품이 보험 가입자들에게 제공되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온다. 가입자들은 치매 진행을 늦출 수 있고,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이 시작되는 시기를 미룰 수 있다. 가입자가 치매 혹은 경도 인지장애 판정을 받으면 흥국생명이 우리 제품을 사서 가입자에게 제공한다. 보장과 예방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최초의 프로젝트다.”
一 처음 있는 형태의 보험이라면 흥국생명과 협의도 오래 했을 것 같다.
“로완이란 회사를 세우고 인지중재치료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보험사와 협력하는 그림을 그렸다. 지난 2~3년간 우리 비전을 소개하면서 사업을 함께 할 보험사를 찾았다. 그 결과 찾은 게 흥국생명이다. 이번 업무협약으로 내놓은 상품은 5개월 정도 회의 끝에 완성됐다. 현재는 두 번째 보험상품도 기획 중이다.”
一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을 이끄는 창업자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부분이다. 다른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을 보면 기술력은 정말 좋은데 거기에 매몰돼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건 사업이고, 디지털 헬스케어는 병원을 상대로 영업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만들어도 병원과 의사가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병원이 우리가 내놓은 제품으로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그 확신을 병원과 의사들에게 줄 수 있어야 기업이 유지되고 산업의 전반적인 규모와 크기가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