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에 푹 빠진 한국인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진짜 노벨상은 아니고 재미로 주는 가짜이다. 과학자가 변기와 배설물을 진지하게 연구한 것이 우습다고 상을 받았지만, 대소변으로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전염병 감염까지 추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평가 받은 결과로도 해석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발간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Annals of Improbable Research)’지는 15일 “스탠퍼드대 의대 비뇨기의학과의 박승민 박사가 제33회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 공중보건 부문상을 수상했다”고 밝혔다.
이그 노벨상은 통상 노벨상 발표 한 달 전에 발표하는 ‘짝퉁 노벨상’이다. 이그는 ‘있을 법하지 않은 진짜(Improbable Genuine)’라는 뜻의 영어 문장에서 앞 글자를 땄다. 노벨상처럼 여러 과학 부문상과 문학상, 경제학상, 평화상이 있으며, 수학상과 환경보호상처럼 노벨상에는 없는 부문상도 수여한다.
◇대소변으로 질병 진단하고 코로나도 추적
주최 측은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나서 새로운 생각을 할 기회를 제공한 연구에 이그 노벨상을 수여했다”라고 밝혔다. 단순히 웃고 넘기지 말고 의미를 곰곰이 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쓸모없는 연구거나 세상에 해를 줬다고 야유하는 성격으로 주기도 하지만, 우스운 모습 이면에 진지한 과학적 고민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박승민 박사가 후자에 해당한다.
박승민 박사는 지난 2020년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에 진단용 스마트 변기를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스마트 변기기 내장 카메라로 대소변 사진을 찍어 10여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변의 색이나 크기, 소변량과 시간 등으로 신체 상태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의사에게 대소변 상태를 말해도 같은 방식으로 진단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박 박사는 “혐오감 때문에 자신의 대소변 상태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며 “스마트 변기는 사용자 대신 대소변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해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스마트 변기로 무증상 감염자를 통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논문을 네이처 출판그룹 학술지에 발표했다. 학교나 공항, 군대 공중화장실의 스마트 변기가 극미량의 대변을 채취하고 내장 진단키트로 바이러스 유무를 판정하는 방식이다.
◇물리학자에서 의학 연구자로 변신
박승민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2008년 미국 코넬대에서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리학자이지만 미세유체를 전공해 자연스럽게 의학 연구로 길을 잡았다. 의료현장에는 임신진단키트나 코로나진단키트처럼 미세유체를 이용한 기기가 많다. 타액이나 소변과 같은 유체가 모세관 현상에 따라 섬유 재질에 스며들면서 위로 빨려간다. 그사이 감염이나 임신 여부를 알려주는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나고 색이 변한다.
박 박사는 이그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밝힌 영상에서 가장 먼저 2020년 세상을 떠난 스탠퍼드대 의대 영상의학과의 산지브 샘 감비어(Sanjiv S. Gambhir)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박 박사는 2013년 감비어 교수 연구실에 방문연구자로 왔다가 이듬해 강사로 자리 잡았다. 박 박사는 “감비어 교수는 평소 건강상태를 점검해 질병을 예방하는 스마트 변기의 기본 개념을 알려준 분”이라고 했다.
감비어 교수는 평생 ‘정밀 건강(precision health)’을 주장한 과학자이다. 정밀 의료가 질병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 치료하는 것이라면, 정밀 건강은 건강상태를 정밀하게 파악해 병을 미리 예방하자는 것이다. 박 박사는 “감비어 교수는 비행기에 센서 수백개를 달아 엔진상태를 모니터하면서 고장을 예방하듯, 의료에도 그런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노벨상과 달리 이그 노벨상은 사후에도 수여된다. 주최 측은 당초 감비어 교수와 박 박사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지만, 감비어 교수 아내가 남편 대신 상을 받기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박 박사는 “사모님은 ‘감비어 교수가 우리와 같이 있다면 이 상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기뻐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의 화장실 운동에 충고하기도
박 박사는 스탠퍼드대에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조각상 앞에서 수락 영상을 찍었다.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가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냄새나는 사람(The Stinker)’이기 때문이다. 이 마스코트는 생각하는 사람이 좌대에서 굴러떨어진 모습이다. 그는 그 앞에 스마트 변기를 두고 설명했다. 나중에는 스마트 변기에 앉아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자세도 취했다. 하반신 부분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웃음까지 안겨줬다.
그는 감비어 교수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도 언급했다. 빌 게이츠는 저개발국가에 화장실을 보급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배설물로 퍼지는 각종 전염병을 깨끗한 화장실로 예방하자는 것이다, 박 박사는 그런 빌 게이츠에게 “화장실은 위생을 넘어 건강 관리로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한 걸음 나가 스마트 변기로 질병을 예방하자는 말이다.
이그 노벨상은 진짜 노벨상 수상자들이 시상자로 나선다. 박승민 박사는 지난 2021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미국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의 아뎀 파타푸티언(Ardem Patapoutian) 박사에게 상을 받았다. 변기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나온 파타푸티언 박사는 이날 스마트 변기의 성과를 재치있게 표현하기 위해 변기 청소용 뚫어뻥으로 트럼펫 음량을 조절하며 연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 이그 노벨상 수상
우리나라는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지만, 이그 노벨상에서는 올해 박 박사까지 모두 다섯 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전 수상자 네 명 중 두 명은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고, 다른 두 명은 그들의 행동을 비꼬는 의미에서 수상자로 선정됐다. 1999년 코오롱의 권혁호씨가 ‘향기 나는 정장’을 개발한 공로로 환경보호상을 받았으며, 미국 버지니아대의 한지원씨가 커피잔을 들고 다닐 때 커피를 쏟는 현상을 연구해 2017년 유체역학상을 수상했다.
종교인들도 수상했다. 2000년에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1960년 36쌍에서 시작해 1997년 3600만쌍까지 합동 결혼시킨 공로로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또 1992년 10월 28일 자정 세상의 종말인 휴거(携擧)가 온다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는 2011년 이그 노벨 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그 노벨상 측은 당시 “수학적 가설과 계산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세상에 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그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돼도 상을 거부하는 과학자도 많았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즐긴 과학자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맨체스터대의 안드레 가임(Andre Geim) 교수이다. 그는 2000년 자석으로 개구리를 공중에 띄운 연구로 이그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가임 교수는 이그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자비를 들여 네덜란드에서 하버드대까지 날아가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가임 교수는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2010년에 그래핀 합성 공로로 진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박승민 박사도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아래에서 변기에 앉아 가임 교수처럼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10년 뒤 그의 스마트 변기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기대된다.
참고 자료
Ig Nobel Prize, https://improbable.com/ig/winners/#ig2023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translmed.abk3489
NPJ Digital Medicine(2022, DOI: https://doi.org/10.1038/s41746-022-00582-0
Nature Biomedical Engineering(2020) DOI: https://doi.org/10.1038/s41551-020-05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