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지구당 부활’이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지구당은 중앙당의 지역 하부조직으로, 20여년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차떼기’ 사건 때 ‘불법 정치자금의 온상’이란 오명을 쓰고 폐지됐었다. 그러나 원외 인사들이 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여야 유력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지구당 부활을 외치고 있다. 지구당이 살아나면 현역 의원이 아닌 원외 정치인도 후원금을 모으고 사무실을 만들 수 있다. 당권·대권 주자로서는 지역 조직 기반을 만들어준 대가로 이들의 지지를 받아 당내 경선에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31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22대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지구당 부활과 관련해 여러 의원들과 견해를 나누기 시작했다”며 “사무총장이 당내 의견 수렴 및 (법 개정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했고, 논의 결과가 나오면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했다. 정점식 정책위의장도 “앞으로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충분히 논의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당 원내지도부의 이런 발언은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이 정치개혁”이라고 밝힌 지 하루 만에 나왔다. 한 전 위원장은 전날 페이스북에서 “’차떼기’가 만연했던 20년 전에는 지구당 폐지가 ‘정치개혁’이었다”며 “지금은 기득권의 벽을 깨고 정치신인과 청년들에게 현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이 ‘정치개혁’이고, 정치 영역의 ‘격차해소’라 생각한다”고 했다.
◇“野는 개딸, 與는 전당대회 표심 노린 술책”
일명 ‘차떼기’로 불리는 사건은 2002년 16대 대선 때 일이다.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이회창 당시 후보의 대선 자금을 모으기 위해 LG, 삼성, SK, 현대차, 롯데 등 대기업으로부터 ‘현금을 가득 채운’ 트럭을 통째로 받았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은행 계좌를 통한 정치자금 거래가 어려워지자, 사과박스에 이어 차량까지 동원한 방식으로 돈을 모은 것이다. 이 때 불법자금 모금 통로로 지적 된 게 지구당이다.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2004년 ‘오세훈법’이라 불리는 정당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지구당은 폐지됐다.
그랬던 지구당이 20여년 만에 ‘정치개혁의 상징’으로 뒤바뀌었다. 특히 여당 당권 주자들이 일제히 지구당 부활 필요성을 거론했다. 정치권에선 경선 때 수도권 원외 조직의 표심을 확보하려는 포석으로 본다. 국민의힘은 4.10 총선에서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전국 254개 지역구 중 현역 의원보다 원외 위원장이 더 많다는 뜻이다.
현행법상 원외 정치인은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정치자금 모금이 불가하다. 지역사무실도 운영할 수 없다. 원외에선 ‘현역의원에만 유리한 규정’이라며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에게 지구당 사무실과 직원 인건비 등 운영비를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후보가 표심을 얻게 된다. 각 지역 원외 조직에서 “지구당을 되살리는 후보를 당대표로 밀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조직 관리에 방점을 둔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표가 직접 불을 지폈다. 이 대표는 지난 23일 부산에서 열린 당원 콘퍼런스에서 “지구당 부활은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최근 당 국회의장 경선에서 강성 팬덤이 지지하는 추미애 후보의 탈락으로 권리당원이 집단 탈당하자, 당원들을 다독일 방안으로 지구당 부활을 거론한 것이다. 이 대표로서는 지역 조직에 속한 당원의 정치참여를 확대해 지지층을 한층 결집할 수 있다.
이미 법안도 나왔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과 김영배 민주당 의원은 전날 각각 지구당 부활을 골자로 한 정당법·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 의원은 유급 직원 2명을 두고 후원회 모금 한도 1억5000만 원을, 김 의원은 유급 직원 1명과 후원금 한도 5000만 원을 명시했다. 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되면, 2004년 지구당 폐지 이후 20년 만에 정당이 지역 조직을 둘 수 있게 된다.
다만 금권정치 부활에 대한 우려도 있다. 각 당 유력 당·대권 주자들의 사당화(私黨化) 도구가 될 거란 지적도 나온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지구당 부활 논쟁은 반(反)개혁일 뿐 아니라 여야의 정략적인 접근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그는 “민주당은 ‘개딸 정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이고, 우리 당(국민의힘)은 전당대회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표심을 노린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