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영수회담이 오는 29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다. 영수회담이란 대통령의 ‘령(領)’과 야당 수장의 ‘수(袖)’를 따서 관례적으로 쓰이는 용어다. 범죄 피의자인 야당 대표와 만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윤 대통령은 4·10 총선 패배 후 이 대표를 만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 대표도 이에 화답했다.
역사적으로 영수회담이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진 건 아니다. ‘칠회칠배(七會七背·일곱 번 만나 일곱 번 배신)’란 말까지 나왔었다. 삼국지 제갈공명의 ‘칠종칠금(七縱七擒·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줌)’에 빗댄 이 말은 국민의 정부가 끝나갈 무렵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이회창 총재 측에서 나온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7차례 영수회담을 가졌으나 모두 뒤통수를 맞았다며 배신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와 영수회담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김대중-이회창 의약분업 합의... 노무현-박근혜 대연정은 실패
27일 정치권에 따르면, 역대 정부에서 단독 영수회담(다자회담 제외)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일하게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자회담은 자주 했다.
이 밖에 박정희 대통령(5회)을 비롯해 최규하 대통령(1회), 전두환 대통령(1회), 노태우 대통령(2회), 김영삼 대통령(2회), 노무현 대통령(2회), 이명박 대통령(3회), 문재인 대통령(1회)도 단독 영수회담을 했다.
과거 영수회담 장소는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었던 청와대였다. 식사를 겸해 회담하는 경우도 있었고 차담회 형식도 있었다. 이번 회담은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차담회 형식으로 열린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에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총재와 7차례나 만났다. 대표적인 성과는 2000년 영수회담을 통해 의약분업을 위한 약사법 개정에 합의한 것이다. 정부가 추진해 온 의약분업 정책을 유지하되, 국회에서 의료계 유화책을 추가로 담은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정부·여당과 야권, 의료계 사이 대치가 완화됐다.
실패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건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이다.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2시간 30분 영수회담을 했다. 노 대통령은 본인의 탄핵 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후 2005년 6월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대연정은 대연립정부의 준말로 이념이 다른 정당이 연합해 함께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영수회담에서 한나라당에 당시 소선거구제였던 선거제 개편을 촉구하면서 동의 시 내각 임명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 대표의 거절로 무산됐다.
2008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영수회담을 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의 17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 회기 내 처리를 요구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FTA가 17대 국회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임기 중에 마무리돼야 한다”고 했지만, 손 대표는 “소고기 협상의 잘못된 점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마지막 영수회담은 6년 전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의 만남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의제와 추가경정예산 문제 등이 다뤄졌는데 서로 입장차만 확인했다.
◇ 많은 뒷말 배출했던 역대 영수회담
영수회담은 회담 그 자체로서 정치적인 의미가 크다. 그만큼 뒷말도 많다. 1997년 이인제 당시 경기도지사는 김대중 당시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제의하자 “3김(金)정치 연장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지적하며 “이제 3김시대는 완전히 끝이 났음을 분명히 선언한다”고 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이기택 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 후, 이 대표가 “방북하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하겠다”고 하자 “대한민국의 대표는 대통령인 나지 이 대표가 아니다”고 면박을 줬다고 알려졌고 반말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회창 총재는 과거 김대중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끝내고 제갈량의 칠종칠금에 빗대 칠회칠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다 결국 사쿠라(변절자)란 소리를 듣겠다”는 당내 농담에 “민생 문제에 대해선 협조할 건 협조하는 게 상생정치”라며 의약분업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봉합했다.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간 회담에서는 허심탄회한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렵게 성사된 김영삼과의 영수회담에서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처가 없으니 이 큰 집이 절간같이 느껴진다”며 눈물을 흘리다 “날 믿으라, 민주주의를 꼭 할 것”이라고 말해 야당 대표인 김영삼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