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발의 법안의 숫자는 폭증했지만, 법안의 품질은 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단어만 고쳐서 발의하는 ‘복붙(복사 붙여넣기)’ 법안, 특정 이슈가 발생했을 때 동일한 내용의 법안 등이 남발된다. 이는 국회의원들이 입법 건수를 늘려 공천용 실적을 쌓기 위해서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25일 국회의사당 앞 정지 표지판. /연합뉴스

9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6일 기준 발의된 법안은 2만4279개, 이 중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2만2467개로 전체의 93%에 달한다. 이미 20대 전체 발의 법안(2만4141개) 개수와 의원 발의 법안(2만1594개) 개수를 뛰어넘었다. 현행 헌법이 시행된 이후인 13대 국회(1988년)와 비교하면 전체 법안 수는 2488%, 의원 발의 법안은 4763% 폭증했다.

반면 법안의 질은 떨어졌다. 현재 발의된 법안 중 가결된 법안 수는 6855개로 28%에 불과하다. 의원 발의 법안의 가결 비율은 이보다 더 낮은 24%였다. 반면 20대 국회에서 가결된 의원 발의 법안은 31%다. 현재 각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1만7074개에 달한다.

의원 법안 발의는 폭증했지만 질은 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 법에서 단어만 바꾸는 법안이 대표적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로 인턴 활동 확인서를 써준 혐의로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확정받으며 직을 상실한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22일 대통령 경호에 관한 일부개정안과 국가장법 일부개정안을 2건 발의했다. 최 전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현행법에 명시된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단어를 ‘당선자’로 명칭을 바꾸자는 내용이다.

그래픽=편집부

민형배 민주당 의원도 5·18 민주화운동의 정의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지난 2020년 12월 1일 4개 발의했다. 이후 해당 법안 4개를 철회하고 제안 이유 중 ‘국민’이라는 단어만 ‘시민’으로 바꾼 후 똑같은 내용의 법안 4개를 2020년 12월 8일 재발의했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도 ‘보철구(補綴具)’라는 단어를 ‘보조기구’로 바꾸는 내용의 법안을 지난 2021년 하루에 7건 발의했다.

하나로 발의가 가능한 법안을 여러 개로 쪼개서 내는 ‘법안 쪼개기’도 의원 입법을 늘리는 사례 중 하나다.

세액 공제 등 각종 세제 혜택을 다루는 조세특례제한법이 대표적이다. 조세특례제한법에는 일몰 규정이 있는데 기간을 몇 년 더 늘리자는 조항만 추가해 발의되는 법안이 여럿이다. 조정식 민주당 의원은 올해만 총 12건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냈는데 모두 세제 혜택의 일몰을 연장하는 내용이다.

거대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남발되는 것도 법안 수 폭증에 기여한다.

올해 5월 김남국 무소속 의원의 ‘코인 논란’이 촉발된 직후, 그달에만 12개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모두 국회의원 등 공직자의 재산 신고 대상에 가상자산을 포함시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이 법안들은 지난 5월 25일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병합돼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해 10월 발생한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직후에도 관련된 법안이 17여 개 연이어 발의됐다. 행사 주체가 불분명한 행사에도 경찰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안전관리 의무를 부과하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은 대부분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 모습. /뉴스1

의원들이 법안 발의 건수에 신경 쓰는 이유는 많은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이 실적으로 이어져 공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난 20대 총선 당시 민주당의 ‘선출직 평가 기준표’에는 입법 수행 실적이 포함돼 있다. 이 실적은 대표 발의 법안의 수, 최종 본회의 의결 때까지 입법 완료 법안 건수, 당론으로 채택된 법안 실적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처럼 법안 건수가 의원들의 실적을 입증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비판에 민주당은 올해 9월 ‘21대 국회의원 평가 시행 세칙’을 확정하며 입법 수행 실적에 단순 자구 수정 법안은 평가에 반영하지 않기로 하기도 했다.

의원 입법의 역량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자 국회 차원에서도 역량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등이 추진하는 입법영향분석 제도가 대표적이다. 입법영향분석은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이후에 불러올 수 있는 규제 요소 등의 영향을 미리 예측·분석하는 제도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지난 7월 4일 취임 1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남은 임기 동안 국회의 입법 역량을 강화하겠다”며 “국회 자체적으로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입법영향분석 사업단’을 발족했다.

박상철 국회 입법조사처장은 조선비즈에 “의원들이 법안 발의를 활발하게 하는 것 자체는 나쁜 현상이 아니다”라며 “다만 법안 발의 수가 많은 것이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척도가 되는 경우가 있어 졸속 입법 비판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규제 법안이나 간호법 등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법안 같은 경우에는 향후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입법 영향을 분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입법 영향 분석을 통한 데이터가 있으면 국회 상임위에서 법안에 대해 논의할 때 좋은 기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현재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한 국회규제입법정책처를 신설해 규제입법영향분석을 의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국회규제입법정책처법안 등이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