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과 관련해, 미국 국무부 전직 관료가 7일 미국의소리(VOA) 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을 모욕한 것이라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미첼 리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6일(현지 시각) VOA의 ‘워싱턴 톡’ 코너에 출연해 ‘이번 방한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진행자 질문에 “미국과 한국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강화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항상 좋은 일”이라고 답했다.
리스 전 실장은 이어 “(펠로시 의장이) 한국 지도자(윤 대통령)를 만나지 못한 건 매우 우려된다. 실수였다고 생각된다”며 “(한국 측이) 중국을 달래려는 계획이었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을 모욕한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이어 “한국이 공동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세계에 보냈다. 그런 가치는 동맹과 서방을 규정하는 것인데도 말이다”라며 “그것은 우리가 (중국·러시아 등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21세기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마크 피츠패트릭 전 국무부 비확산 담당 부차관보는 리스 전 실장의 발언에 강하게 긍정한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리스 전 실장의 모든 의견에 동의한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는다는 한국의 결정은) 모욕적이었다”고 했다.
피츠패트릭 전 부차관보는 “(한국의 결정이) 중국을 달래려는 시도였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불행하게도 중국에 한국을 괴롭혀도 된다는 인식만 줄 것이다. 한국을 압박할 수 있고, 한국은 중국의 의지에 굴복할 것이라는 인식을 줄 것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인식을 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또다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어떻게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한국 외교정책의 오랜 집착”이라고 했다. 다만 “한국은 자신들의 안보와 역할이 미국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며 “아무리 균형을 잡으려고 해도 한국은 결국 미국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오는 8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해, 산둥성 칭다오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회담한다. 이번 방중은 윤석열 정부고위급 인사로서는 첫 방문이다.
리스 전 실장은 “한국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모호성이 없기를 바란다”며 “한국은 미국과 함께 서 있다. 우리가 공유한 가치를 지지하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이견이 있다면 물밑에서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한국을 위해서도, 외교를 하는데 있어서도 그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했다.
펠로시 의장은 한국에 이어 방문한 일본에서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 조찬 회담을 했다. 펠로시 의장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 측 관계자는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외무성 부대신(차관)이 영접했다. ‘왜 한국과 일본에서 펠로시 의장에 대한 응대가 달랐을까’라는 질문에 리스 전 의장은 “중국에 대한 존중이 잘못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수라고 본다”고 했다.
피츠패트릭 전 부차관보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국은 열망하는 만큼 국제적 역할을 맡는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중국의 생각을 살피며 자꾸 뒤돌아보고 안전하게 가려고만 한다”며 “반면 일본은 세계 속에서의 역할을 인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며 “우크라이나 위기 속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즉각 제재한 나라 중 하나였다”고 했다. 이어 “한국은 (러시아 제재를) 며칠 기다렸다. 언제나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다”며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이어질지 모르지만, 조금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경제 제재에 머뭇거린 점을 말하며, 윤석열 정부도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펠로시 의장은 지난 3일 밤 방한해 약 23시간 동안 김진표 국회의장과 회담·오찬, 비무장지대(DMZ)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지방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서초동 자택에 머무르며 휴가를 보내고 있던 윤석열 대통령은 만나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지난 3일 그 이유에 대해 “펠로시 하원의장의 방한 일정이 대통령의 휴가 일정과 겹쳤기 때문에 대통령을 만나는 일정은 잡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대학로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배우들과 식사를 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하루 뒤 대통령실 최영범 홍보수석은 윤 대통령과 펠로시 의장의 대면 면담 불발이 중국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문의가 많다면서 “모든 것은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모두 정상을 만났다. 싱가포르에선 리셴룽(李顯龍) 총리, 말레이시아에선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총리, 대만에선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일본에선 기시다 총리와 만났다. 윤 대통령은 급하게 전화통화하는 일정을 잡아, 펠로시 의장과 하원 의원단 5명,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 등 7명과 40분간 통화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지난 5일 ‘펠로시 의장이 윤 대통령 만남을 추진했는데, 한국 측이 거절 의사를 밝히니 서운함을 표시했다는 얘기가 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사자인 펠로시 의장은 방한 결과, 또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 대해 만족스럽다고 말하고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