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5일 건설이 지연된 신한울 1·2호기, 신고리 5·6호기에 대해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단계적 정상가동을 할 수 있도록 점검해달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탈(脫)원전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날은 “원전은 향후 60여년간 주력 기저전원”이라고도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산(産) 액화천연가스(LNG)가 유럽 안보를 위협하는 아킬레스건(취약점)으로 지목되자,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원전으로 눈을 돌린 것으로 해석된다.
◇靑 “우크라이나 사태 속 안정적 전력 공급 위해 원전 실태 점검”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를 주재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회의에 대해 “우크라이나 사태 등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불안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 기반 확충을 위해 국내 원전 실태를 점검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이 에너지 안보를 위해 원전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불안에 대응한 원전 현황 점검과 미래 준비에 대해 보고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신한울 1·2호기, 신고리 5·6호기가 가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시운전 상태인 신한울 1호기는 이르면 올해 8월부터 가동할 수 있다. 신한울 1호기는 원래 2017년 6월 상업운전을 할 예정이었다.
다른 원전은 현재 짓고 있는 단계다. 신한울 2호기는 건설 막바지 단계로, 이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운영 허가가 필요하다. 신고리 5·6호기는 각각 2024년 3월, 2025년 3월 상업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한울 2호기는 2018년 4월에 상업운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고, 신한울 5·6호기는 각각 작년 10월, 올해 10월 상업운전이 목표였다.
문 대통령의 “단계적 정상가동” 지시는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더 지연되지는 않게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원전은 향후 60여년간 주력 기저전원”이라는 발언은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확대하더라도 원전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국민의힘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이제와 ‘원전이 주력전원’이라고 한다”며 “솔직하게 국민 앞에 탈원전 정책실패를 인정하고, 위기상황에서 기댈 곳은 원전밖에 없다는 것을 털어놓으라”고 비판했다.
◇유럽, LNG 40%를 러시아 의존…우크라이나 침공 때 행동 제약
문 대통령의 ‘원전 단계적 정상가동’이 나오게 된 것은 유럽의 에너지 안보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LNG 수요의 4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독일은 60% 이상을 러시아에서 공급받는다.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경제 제재를 가하면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을 차단할 수 있고, 이 경우 유럽은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게 된다. 겨울철에 국민들이 추운 날씨에서 떨어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실제로 LNG를 무기화하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21일 러시아에서 시작해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이어지는 ‘야말-유럽 가스관’ 밸브를 잠갔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은 이 가스관을 통한 수출 물량을 예약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유럽과 갈등, 러시아에서 발트해 해저로 독일을 직결하는 1230㎞ 길이의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 승인 지연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됐다. 노르트스트림2는 2020년 9월에 완공됐지만, 독일은 승인을 미뤄왔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상대로 가스관 가동 승인 거부를 요청했다.
결국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하자 실시한 제재도 ‘노르트스트림2′와 가스프롬을 겨냥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노르트스트림2 AG와 회사 임원들에 대한제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노르트스트림2 AG는 노르트스트림2 건설을 주관한 스위스 소재 기업이다. 가스프롬이 지분 100%를 갖고 있다.
그간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노르트스트림2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될 경우, 유럽의 러시아 의존도가 심해질 수 있다고 경계해 왔다. 이미 LNG 수요의 60%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독일은 에너지 안보에 더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
독일은 지난 22일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중단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 분리주의 세력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군을 투입하기로 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심각한 국제법 위반을 저질렀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文정부 추진한 남북러 가스관 사업 전망 어두워져
유럽의 에너지 안보 위기는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이달 초 한국과 일본에 유럽에 대한 LNG 지원 의사를 타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유럽의 LNG 수급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뮌헨안보회의에서 “우방들로부터 LNG 물량을 확보해 러시아산 가스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또는 일본처럼 우리와 (천연가스 수입) 계약을 스와프해 LNG 수송선을 EU로 돌릴 의사가 있는 바이어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 제안을 수락하고, 유럽에 내수용 LNG 일부를 융통하기로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 20일 “유럽 천연가스 수급에 어려움이 발생할 경우 유럽을 지원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산 가스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 전망도 어둡게 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차이가 나고, 전력 수요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가동과 정지 시간이 매우 짧은 LNG 화력발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북한을 관통해 러시아에서 LNG를 직접 공급받을 수 있는 가스관을 건설하면 전력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유럽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외교적 이유로 가스관을 차단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만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 22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러시아 언론 기자로부터 ‘남북러 가스관은 노르트스트림2와 비슷한데, 문재인 정부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이 문제는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사회의 협력과 평화, 안정이 얼마나 북한 경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며 “러시아와 북한, 대한민국 간에 가스 협력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바가 대단히 많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