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6일 한국의 코로나 시기 소상공인 지원 등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지원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낮다고 비판하면서 “개인부채는 시간이 지나서 못 갚으면 파산하지만, 국가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적극적 재정지원으로 국가부채가 늘더라도 개인부채를 줄이자는 주장을 하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그러나 이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이 ‘독자적인 통화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불려도 국가 부도는커녕 아무 문제가 없으니, 재정 적자는 걱정하지 말고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자’는 주장을 주요 골자로 한 현대통화이론(MMT) 주창자들을 연상시킨다는 말이 나왔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 등 미국 민주당의 급진 좌파들이 신봉하는 MMT는 경제학계에서는 이단아적인 이론 취급을 받는다.
이에 이 후보가 지난해 9월 언급한 “국가의 가계이전소득 지원으로 가계소득을 늘려 가계부채를 줄이고 재원은 금리 0%인 (만기 상환이 없는) 영구 국채로 조달하자”는 취지의 최배근 건국대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고 지지한 페이스북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野 “국가부채가 이월된다고? 유지 안되면 파산... 그리스를 보라”
이 후보는 이날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소상공인과 함께 하는 전국민 선대위’에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출연으로 부득이 방역 방침이 강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번에는 정부 역할을 좀 더 강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 후보는 “가계부채 비율 증가 그래프와 국가부채 비율 증가 그래프가 반대로 움직인다”면서 “이 차이만큼을 결국 국가가 부채비율을 줄인 거고, 국민이 빚으로 안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개인 부채는 시간이 지나서 못 갚으면 파산하지만 국가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면서 “외국에 빚지고 있으면 나라가 위험할 수 있는데 우리가 경제 선진국이기 때문에 선진국 평균치 정도만 해도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런데 반대 아니냐”고 말했다. 국가부채가 늘더라도 적극적 재정지원 정책을 통해 개인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야당은 ‘국가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는 이 후보의 주장은 전제가 있는 ‘절반의 진실’로 보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장 출신의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국가부채가 이월된다는 것은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지, 유지가 안되는 수준에 다다르면 파산”이라며 “함부로 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윤 의원은 그러면서 “국가가 파산하면 부채를 이월 할 수 없고, 그 대가는 국민들이 다 치러야 한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어렵고 힘든 저소득층, 연금소득자, 복지 수혜자부터 소득이 줄고 국가 지원이 다 끊겨버린다”면서 “그리스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 후보의 이 같은 주장이 이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재정 건정성’을 가볍게 여기는 과거 주장들의 연장선 위에서 나온 점이 더 우려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국가부채는 이월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결국 정부가 재정지원을 더 해야한다는 말인데, 재정적자는 걱정 말고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자는 현대통화이론(MMT)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우려했다.
현대통화이론으로 해석되는 MMT는 정부가 경기부양에 필요한 정책을 도입하는 데 돈이 모자란다면 일단 화폐를 발행하고, 이로 인해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 같다면 세금을 거둬들여 예방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미국 비주류 경제학계에서 주창한 이론을,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 등 미국 민주당 좌파들이 주장하면서 유명해졌다. 한마디로 과도한 인플레이션만 없다면 경기부양을 위해 화폐를 마음껏 발행해도 된다는 내용이다.
◇李, 작년 9월엔 “금리 0% 국채, 한은 인수시켜 지역화폐 주자”
이 후보가 직접 MMT를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 후보가 MMT에 경도된 것 아니냐는 의혹은 지난해 9월에도 제기됐다. 정부가 금리 0%의 영구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인수해 마련한 재원을 통해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를 지급하자는 주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경제학계에서는 “정부가 돈이 필요하면 한국은행이 돈을 찍고 정부는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는 식이다. MMT를 따르자는 것이냐”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 후보는 지난해 9월 6일 페이스북에 올린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악성 가계부채를 줄이고 경제를 살리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상환의무가 없는 ‘영구국채’를 발행해 가계에 현금성 지원을 하고 이를 통해 가계부채를 줄이자는 최배근 건국대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고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후보는 당시 “’국가의 가계이전소득 지원으로 가계소득을 늘려 가계부채를 줄이고, 재원은 금리 0%인 영구국채(상환의무 사실상 없음)로 조달하되 고소득자 감면세액(연간 약 60조원)으로 보완하여 경제와 민생을 살리자’는 최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정부의 가계지원은 시한부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로 해서 자영업자의 매출과 기업의 생산을 유발하게 해야겠지요?”라고 썼다.
이에 앞서 최 교수는 지난해 9월 5일 페이스북을 통해 “2020년 상반기 기준으로 2019년보다 민간소비가 인구 증가나 물가 상승 등까지 고려하면 상반기에만 27조 감소, 연 54조원 규모가 감소했다. 따라서 해당 규모 만큼의 가계 소비지출의 지원이 시급하다”면서 “연 54조원 재원조달은 정부가 만기 30~50년 만기(0% 금리, 원화표시)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인수해 한은 금고에 저당하자”라고 주장했다. 여당 지도부도 지난해 8월 2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앞두고 대놓고 ‘MMT’나 ‘헬리콥터 머니’를 언급했었다.
◇MMT 정통 경제학계에선 인정 못받아... ‘사이비’, ‘이단’ 낙인도
MMT는 검증되지 않았고 정통 경제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이다. ‘사이비’, ‘이단’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MMT는 달러를 발행하고 국채가 잘 팔리는 미국에서나 가능한 이론”이라며 “우리나라 같이 남들이 쓰지 않는 돈을 쓰는 나라가 그렇게 국채를 막 찍어내면 어떻게 견딜 수 있나.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창현 의원은 “MMT는 사이비”라면서 “기축 통화를 발행하는 미국에서나 일시적으로 가능한 것을 전세계 국가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논지를 만든 정통경제학과 무관한 이론”이라고 우려했다.
앞서 이주열 한은 총재도 지난해 8월 24일 국회 기획재정위 업무보고에서 “부작용이 상당히 크고 본격 채택한 나라는 없다”고 했다.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MMT가 틀렸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많았다.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국채가 시장에 공급되면 채권 가격이 하락(금리 상승)하기 때문이다. 국채 금리에 영향받아 기업과 은행이 발행하는 채권금리도 상승하게 되고, 은행 대출금리도 동반 상승한다. 한마디로 정부가 빚을 낼수록 민간은 더 비싼 이자를 내야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12월 들어 인플레이션이라는 우려는 더 짙어졌고, 주요 은행의 변동형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6%를 바라보는 등 이자 부담도 크게 늘었다.
☞현대통화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
현대통화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은 국가가 과도한 인플레이션만 없다면 경기부양을 위해 화폐를 마음껏 발행해도 된다는 내용이다. 정부 지출이 세수를 뛰어넘어선 안 된다는 통념을 넘어선 것이다. MMT는 국가가 경기부양에 필요한 정책을 도입하는 데 돈이 모자란다면 일단 화폐를 발행하고, 이로 인해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 같다면 세금을 거둬들여 예방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현대통화이론의 주요한 내용은 1990년대 빌 미첼, 워런 모슬러, L. 랜달 레이 등에 의해 형체를 갖췄지만, 최근 미국 민주당 관련 인사들의 언급으로 대중화됐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은 2019년 ‘그린 뉴딜’ 정책의 재원을 MMT를 이용해 확보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을 내놨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버니 샌더스의 자문역을 맡았고 ‘재정적자라는 신화: 현대통화이론과 국민경제의 탄생’라는 책 낸 스테파니 켈턴 교수도 MMT 주창자다.
그러나 MMT와 관련해 정통 경제학계에서는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다. ‘대표적인 비둘기파’로 불린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도 “MMT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MMT를 과하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정치적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