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지난 11일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1130조원으로 한 달 전보다 9조3000억원 늘었다. 3년 1개월 전인 2021년 7월 9조7000억원 증가 이후 최대 규모 증가 폭이다. 당시 기준 금리는 0.5%에 불과했다. 기준금리가 3.5%인 고금리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대출 수요가 폭발한 것이다.

가계대출의 대부분은 주택담보대출이었다. 지난달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역대 최대인 8조2000억원 증가했다. 수도권 주택 매매거래가 활발해지고, 입주물량이 늘면서 주담대가 급증했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빠르게 증가하는 가계부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경제 전문가들은 최근 한국 경제 최대 불안 요인으로 가계부채를 꼽았다. 물가가 안정된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내수 부진에 대한 우려가 커졌지만, 가계부채 증가를 우려해 통화정책을 쉽사리 전환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 리스크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래픽=손민균

◇ 전문가 “가계 부채가 경제성장 잠식”… 국제기구도 경고음

조선비즈가 실시한 국내 경제전문가 20인 설문에서 과반수 이상인 11명이 한국 경제 최대 리스크(3개 선택)로 ‘가계부채’를 꼽았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00% 수준까지 간 것은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가계 부채도 커졌다는 얘기”라며 “가계부채에 따른 이자가 비용으로 발생하는데, GNI 증가율이 이자율인 3~4%를 못쫓아가고 있다. 부채가 경제성장을 잠식하는 수준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이어 “가계부채로 인한 금융위기를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가계에서 원리금을 갚기 위해 소비를 포기하는 수준”이라며 “소비 위축과 내수부진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한은은 최근 가계대출 증가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2분기 이후 다시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행이 12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부채 비율은 2021년 3분기(99.3%) 정점을 찍은 뒤 올해 1분기 92.1%까지 내려왔다. 한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평균 60.1%) 중 4번째로 높은 수준”이라며 “금융권 가계대출이 월 5조∼6조원씩 증가하면 가계부채비율은 다시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가계 빚은 소비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소비를 제약하는 원리금상환비율(DSR) 임계치는 47%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를 상회하는 가계 비중은 2013년 5.1%에서 2023년 12.2%로 크게 늘었다. 한은은 “수도권 주택가격과 가계부채 추이가 금융 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 향후 금리 인하 시기와 속도 등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과도한 금리 인하 기대가 형성되지 않도록 시장 기대를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가계부채 현황에 대해 국제기구에서도 경고음이 나왔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과 중국을 거론하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 비율이 100%를 넘어 경제성장률도 정점을 찍었다”면서 “중장기적으로 부채 상환과 이자 지급 부담으로 인해 미래 성장 잠재력이 약화할 수 있다”고 했다.

가계부채로 인한 금융 불안은 현재 한은의 금리 인하 결정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부채가 급증하는 시기 금리를 내리면 고금리가 붙잡고 있던 대출 수요가 터져나올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2일 오전 추석명절 대비 응급진료체계 현장방문차 서울 동대문구 린 여성병원을 방문해 신생아실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 저출산·고령화, 산업경재력 약화 우려 커

가계부채에 이어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 구조 위기’(10명)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국책연구기관과 기관 씽크탱크 소속 전문가들은 대부분 저출산·고령화를 한국경제 최대 리스크로 지목했다.

백인석 자본시장연구원 거시금융실장은 “경제 변화는 추세적인 변화와 경기 변동과 같은 순환적인 변화가 있다”면서 “한국은 추세적으로 봤을 때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는데, 가장 큰 하락 요인이 저출산·고령화라고 본다. 어떻게 해결할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국내 산업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전문가도 8명에 달했다. 최근 한국의 수출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호조세를 보이고 있지만, 다른 업종에선 기술 격차가 좁혀져 경쟁우위에 서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이와 관련,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산업 생태계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며 “규제로 인해 새로운 사업이나 플레이어가 나오기에 제약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익명의 전문가는 “국내 산업 경쟁력 약화는 지배구조와도 연관이 있다. 지배구조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사업 재편이나 혁신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면서 “이로 인해 기업들이 적절하게 변신을 못하고 있다. 그동안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한 한국이 따라갈 모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미·중 패권 경쟁 심화(6명)에 대한 우려와, 경기 둔화, 소비 위축, 세수 부족으로 인한 재정정책 운용 한계(각각 5명)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래픽=손민균

경기 둔화와 소비 위축에 대한 우려 때문일까. 내년도 정부 재정 정책 방향에 대해 전문가 대부분이 ‘경기 둔화 대응을 위한 확장재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긴축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낸 전문가는 2명에 불과했다. 1명은 무응답이었다.

재정정책은 정부가 재정지출이나 세수변동을 통해 총 수요를 조절해 경기를 부양하거나 진정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불경기 때 정부는 경기활성화를 위해 지출 확대, 세금 감면 등 확장 재정정책을 실시한다.

반면 경기가 과열됐을 때 정부는 재정지출을 축소하고 세금을 늘리는 긴축 재정정책을 통해 총 수요를 감소시킨다. 경제가 과열돼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할 때 주로 긴축 재정정책을 시행한다.

‘확장 재정’이 필요하다고 주문한 전문가들이 다수라는 것은 그만큼 한국 경제가 경기 침체기에 들어설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다만 윤석열 정부는 3년차 예산안의 기조를 ‘긴축 재정’으로 잡고 수립했다.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3.2% 늘어난 677조원 규모로 편성했다. 내년 물가상승률(정부 전망 2.6%)을 소폭 상회하면서도 정부의 경상성장률 전망치(4.5%)는 밑도는 수준이다.

◇설문에 참여하신 분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고태봉 iM증권 리서치본부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현수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정책팀장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 ▲백인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부 부교수 ▲윤창용 신한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병건 DB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 ▲정영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장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부교수 ▲홍기석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