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 주요국 통화 중에서 가장 절하 폭이 큰 통화 중 하나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强)달러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의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원화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원화 약세 흐름이 적어도 4분기까지는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 원화가치, 64개국 중 56위… 구매력 큰 폭 하락

20일 국제결제은행(BIS)이 64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5월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지수는 95.2(2020년=100)를 기록했다. 한 달 전 95.0보다는 소폭 올랐지만, 기준선인 100을 넘겼던 2021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보다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지녔는지를 나타내는 지수다. 기준 시점과 현재 시점 간 상대적 환율 수준을 평가해 수치가 100을 넘으면 기준연도 대비 통화가 강세를, 100보다 낮으면 약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픽=정서희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지수는 64개국 중 56위다. 지수가 낮은 순서로 따지면 9번째다. 기준연도인 2020년 대비 통화가치가 절하된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크다는 의미다. 원화보다 실질실효환율지수가 더 낮은 통화를 가진 나라는 일본(68.65), 중국(91.12), 태국(92.06), 말레이시아(94.08), 노르웨이(94.24), 튀르키예(94.26), 스웨덴(94.46), 이스라엘(95.12)이다.

조사대상 국가 중 실질실효환율지수가 가장 높았던 국가는 멕시코(141.2)였다. 멕시코는 미국 근처에 공장을 세우려는 ‘니어쇼어링’ 수요로 외국인직접투자가(FDI) 급격하게 늘면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폴란드(121.47, 4위)와 콜롬비아(114.29, 7위), 브라질(113.53, 11위), 미국(109.58, 18위) 등도 통화가치가 높은 축에 속한다.

주요 국가 중에서는 한국의 환율이 절하된 정도가 더욱 크다. 조사대상 64개국 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37개국, 코스타리카 제외)만 추려보면 한국은 일본과 노르웨이, 터키, 스웨덴, 이스라엘에 이어 6번째로 지수가 낮다. 주요 20개국(G20) 국가(19개국, 브라질 제외)로 좁히면 일본과 중국(91.12), 터키에 이어 4번째다.

◇ 强달러에 맥 못추는 원화… “엔·위안 동조화 영향도”

이처럼 원화의 실질가치가 하락한 배경으로는 달러 강세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직후 시작된 경기 침체로 금리를 0.25%까지 낮췄다가 엔데믹(endemic·감염병의 풍토병화) 이후 5.5%까지 높였다. 이 과정에 달러는 약세에서 강세로 빠르게 돌아섰고, 원화는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실제로 BIS 자료를 보면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 11월 미국의 실질실효환율지수는 97.02로, 기준 시점과 비교해 화폐가치가 절하돼있었다. 조사대상 64개국 중에서는 59위로 한국보다도 순위가 낮았다. 그러나 엔데믹과 함께 순위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2022년 10월에는 112.99까지 치솟았다. 조사대상국 중에서는 5위였다. 이후 통화가치가 하락하면서 지금은 20위 안팎을 오가고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와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의 통화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한 것도 영향을 줬다. 일본은 2020년 5월 103.42까지 올랐지만 4년 만에 68.65로 떨어지면서 조사대상국가 중 하락 폭이 가장컸다. 중국은 2020년 3월 101.23까지 오른 후 하락해 현재 91.12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일본은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펴고 있고, 중국도 통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원화는 엔화와 위안화에 동조화되는 특징이 있어 절하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체적으로 아시아국가의 금리 수준이 외국에 비해 낮다 보니 통화가 절하된 게 아닌가 추측된다”고 했다.

◇ “원화 약세, 4분기까지 지속… 트럼프 당선이 변수”

전문가들은 원화 약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여전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가 11월로 예정된 대선에서 보호무역을 강조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미국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물가는 치솟고 미국의 금리 인하 속도는 더뎌질 수 있다.

신윤정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9월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내리면 달러에 대한 투자수요도 같이 빠지면서 달러 약세를 기대해볼 수 있지만, 원화는 우리나라의 내수 상황이 좋지 않아 강세 폭이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면서 “달러 약세 흐름도 지속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경기부양적 정책을 펼치면 달러 강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3분기 말에서 4분기 정도는 돼야 원화 약세가 잦아들 것”이라면서 “중국과 유럽의 수요가 회복되는 시점이 4분기로 예상되므로, 원화 약세는 그 시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대외 불확실성을 높이는 정책을 택할 수 있어 강달러 압력이 간헐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