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자율변동환율제 채택 이후 20년 넘게 변화가 없던 외환시장이 탈바꿈한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운영되던 국내 외환시장 영업시간이 1일부터 다음 날 오전 2시로 연장됐다.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24시간 개장도 검토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원화 거래가 편해졌고, 해외 소재 금융기관도 국내 외환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외환시장의 변화와 시장 참가자들의 대응 전략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1일 오후 방문한 하나은행 딜링룸. /김수정 기자

1일 오후 10시,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과 목소리(보이스)로 거래한 외환중개사가 “이제 4시간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날은 미국 6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가 발표된다. 제조업 PMI 지수는 미국 제조업 부문 구매관리자의 활동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지수가 50을 넘는 경우 경기 확장, 50 미만이면 경기 위축을 뜻한다.

이날 지표는 48.5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잠시 원·달러 환율이 하락했다. 딜러들의 입과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3개 솔드(매도)”, “이거 사버려(매수)” 등의 말이 딜링룸 안에서 오갔다. 오후 11시 30분 거래는 잠시 소강기를 맞았다. 직원들의 피로함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커피와 얼음물을 마시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버텨야 했다.

정부의 ‘외환시장 구조개선’에 따라 이날부터 외환거래 마감 시간이 오후 3시 30분에서 다음 날 오전 2시로 연장됐다. 총 29곳의 RFI(외국금융기관)가 시장 참여 자격을 갖추고 ‘환율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그동안 야간에는 실시간 환율이 아닌 임시환율(가환율)로 외환 거래를 해야 했던 개인과 기업투자자들이 원하는 환율을 적용해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1일 오후 방문한 국민은행 딜링룸. /이신혜 기자

◇ 국민은행, 심야 외환 거래 이상無

국민은행은 서울본점 직원 2명과 런던지점 직원 1명이 함께 팀을 이뤄 심야 외환거래를 책임진다. 이날은 첫 심야외환거래 시행날인 만큼 관리자급인 부장들도 나와 거래를 지켜봤다.

오후 9시 30분쯤 “오! 던(DONE)이다 던”이라는 소리가 자본시장영업부에서 터져 나왔다. ‘던’은 계약이 체결됐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다. 장한솔 시장운용부 과장이 지정가로 걸어놓은 5개 거래가 체결됐다. 통상 1개 거래는 100만달러 단위로 이뤄진다. 500만달러(약 69억원)어치 물량이 체결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후 7시 이후 처음으로 기업투자자의 대규모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NDF(차액결제선물환) 시장은 국내가 아닌 역외 시장에서 원화 이동 없이 차액만 달러로 결제한다. 해외에서 거래되는 NDF 시장의 물량을 역내(DF) 시장으로 들여와 거래가 활발해져야 외환시장 개선 효과가 커질 수 있다. 거래량이 활발해야 매수·매도 호가 스프레드(차이)가 좁혀진다. NDF 시장에서 형성되는 매수·매도 호가 스프레드보다 국내 외환시장에서 형성되는 매수·매도 호가 스프레드가 좁혀져야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다만 이날 RFI의 거래가 활발하진 않았다. 이성희 국민은행 부행장은 “장기적으로 RFI가 많이 들어와야 하는데 첫날이라 그런지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국내 투자자들이 거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유동성도 활발한 상태라 RFI도 곧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환시장 개장시간 연장을 맞아 지난 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을 방문, 외환 딜링룸 야간 데스크 근무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도 ‘불야성’

서울 여의도에서 8㎞가량 떨어진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외환 딜링룸. 이곳 역시 오전 2시까지 늘어난 외환전쟁을 치르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하나은행은 전날부터 총 5명의 야간 조를 투입해 인력을 재배치했다. 은행 간 시장 딜러 2명, 세일즈 딜러 1명, 전자거래플랫폼(API) 담당자 1명 그리고 결제 업무를 맡는 백오피스 담당자 1명이 1주 단위로 교대 근무한다. 기존에는 오후 3시 30분 장 마감 이후 프런트 1명, 플랫폼사업부 1명 등 총 2명의 직원이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자리를 지켰다.

2일 오전 2시 외환거래가 마감됐다. 이날 외국환중개회사를 통한 원·달러 현물환 거래량은 총 125억6300만달러를 기록했다. 기존 마감 시간인 전날 오후 3시 30분 이후 거래량은 24억5500만달러로 하루 거래량의 20%를 차지했다.

시중은행은 외환시장이 연장되면서 미국 주식·채권 등 금융상품 거래 시 국내 투자자의 혜택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국내 수출입기업도 환차손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시장을 담당하는 딜링룸 한 관계자는 “기존에는 역외 거래만 가능하던 시간대에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터지면 다음 날 장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며 “앞으로는 실시간 환율이 적용되므로 매수·매입 시 환차손을 줄일 여지가 생겼다”고 했다.

특히 이종통화 시장도 오전 2시까지 거래가 가능해진다. 터키 리라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 폴란드 즈워티 등 신흥국의 통화는 일반적으로 런던 시장의 거래가 열리는 오후 4시쯤 시장 유동성이 풍부해져 호가가 좋아진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이전에는 신흥시장의 통화는 호가 물량이 얇아 대규모 거래도 성사하기 어렵고, 거래에 따른 변동성도 커졌다”며 “이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규모 물량 거래도 가능해졌다”고 했다.

심야 외환거래 첫날, 이성희 국민은행 부행장이 딜링룸을 찾아 장한솔 과장과 호가 스프레드를 보고 있다. /이신혜 기자

◇ 매일 반복될 심야 근무…분주해진 은행·한은·정부

금융권은 외환시장 선진화에 따른 시장 확대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해외 RFI가 들어와 국내 외환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게 외환거래 시간을 연장하는 가장 큰 이유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조급하게 볼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외국 투자자들에게 서울 (외환거래) 시장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환시장 심야 개장으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할 일도 많아졌다. 한국은행은 29개의 RFI와 40개 이상의 국내 금융사와 직접 소통하며 외환 거래 상황을 모니터링한다. 김신영 한국은행 외환시장팀 팀장은 “팀원 12명 중 10명이 돌아가며 야간 외환거래를 모니터링한다”며 “오후 4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근무하며 외환시장 거래 이후에도 시장 상황 정리 및 후속 대응을 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정부도 한은과 사정이 비슷하다. 기획재정부는 외환시장 담당 직원 3명이 돌아가며 8시간씩 외환시장 동향 및 분석에 들어간다. 김희재 기재부 외화자금과장은 “주야 불문하고 면밀하게 외환시장을 보면서, 필요하면 시장안정조치 등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이번 외환시장 거래 연장으로 외환 거래가 더 많이 이뤄질 것이고 국내외환시장 유동성도 커질 것”이라며 “한국의 외환시장이 한층 더 선진화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