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pandemic·감염병의 풍토병화) 이후 국내 기업들이 생필품 가격을 더 자주 올렸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인상 빈도는 이전보다 40%가량 증가했으며, 약 9개월 수준이었던 가격 유지기간도 6.4개월로 단축됐다. 가격 인상 빈도가 잦아진 상황에서 유가 상승과 같은 외부 충격이 발생하면 물가가 더 가파르게 오를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

1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팬데믹 이후 국내기업 가격조정행태 변화의 특징과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가격조정(인상·인하 포함) 빈도는 2018~2021년 월평균 11% 수준에서 2022~2023년 평균 15.6%로 약 42%가량 상승했다. 한은은 한국소비자원의 생필품 가격 데이터를 활용해 이 같은 결과를 도출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고추장을 고르고 있다. /뉴스1

가격 조정 빈도는 특정 제품의 가격이 해당 월에 조정될 확률을 의미한다. 한은 관계자는 “이를 가격 유지 기간으로 환산해보면 과거엔 9.1개월에 한 번 가격을 조정했지만, 이제는 6.4개월에 한 번씩 가격을 재설정 했다는 의미”라면서 “가격을 바꾸는 기간이 짧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에 따르면 비용압력이 높은 품목일수록 조정 빈도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제품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중간재 중 수입품의 비중이 큰 조미료·식용유지 등은 가격 인상 빈도가 6%를 넘었다. 반면 수입품 비중이 적은 위생용품과 과자·빙과류는 2%가 채 되지 않았다.

반면 가격 인상 폭은 팬데믹 이전과 비슷했다. 국내 생필품 가격 인상률은 1회당 평균 20~25%, 인하율은 15~20% 수준으로 유지됐다. 한은은 “고물가 시기에 기업들이 가격변화에 따른 소비자의 저항 및 민감도, 경쟁 제품으로의 대체효과 등을 고려해 가격 인상 시 ‘폭’보다는 ‘빈도’를 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한은은 기업들의 가격 조정 빈도가 높은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물가가 더 큰 폭으로 오를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용 상승 압력이 상품가격에 바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은이 회귀분석을 통해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가격 인상빈도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물가 상승률이 1%포인트(p) 상승하면 개별품목의 가격 인상 빈도도 1%p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 조정 빈도가 높으면 외부충격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더욱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 분석 결과에 따르면 가격조정 빈도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유가 상승과 같은 비용상승 충격의 크기가 두 배로 커질 경우, 물가상승률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고유가나 펜트업 소비(억눌렸던 수요가 급속히 살아나는 현상) 등 서로 다른 충격이 동시에 발생한 경우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충격이 개별적으로 발생했을 때보다 더 크게 나타났다.

한은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목표 수준을 상당 폭 상회하는 상황에서 향후 새로운 충격이 발생하면 인플레이션 변동 폭이 물가 안정기보다 더욱 커질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면서 “향후 물가 상황을 판단할 때 기업의 가격조정 행태가 과거 수준으로 돌아가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