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2년 5월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자동차 업계와 노동조합의 요구에 맞춰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에 나서기로 하면서 미국 내 대규모 투자에 나선 2차전지 기업들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우려 섞인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기록한 국내 자동차 업체들에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7일(현지 시각)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전기차 도입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대선을 약 9개월 앞둔 시점에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의 표심을 붙잡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환경보호청(EPA)이 지난해 4월 발표한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전기차 전환을 지연할 방침으로 전해졌다. EPA가 제시한 기준을 지키기 위해선 자동차 회사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전기차 판매 비중을 늘려야 한다. 해당 기준을 준수하려면 2032년에 판매되는 승용차 3대 중 2대는 전기차여야 할 정도다.

NYT는 이와 관련 “바이든 행정부는 자동차 업계에 준비할 시간을 더 주기로 했다. 2030년까지는 배출가스 기준을 서서히 강화할 것”이라며 “2030년 이후 대폭 끌어올려 전기차 판매를 급격히 늘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은 국내 기업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전기차 생산 확대를 기대하며 미국 내 투자를 늘린 2차전지 업체들로선 2차전지 판매 저하에 따른 실적 부진 우려가 나온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의 최대 피해자는 2차전지 업체가 될 것”이라면서 “‘빅3 대기업’이 미국 투자를 급격히 늘린 상황에서 전기차 전환을 지연하겠다는 것은 절대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향후 10년 내 미국 내 2차전지 생산 규모는 1000GWh(기가와트시)가 되고, 이 중 60% 이상인 630GWh가 한국 3사가 담당하게 된다”면서 “전기차뿐만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 확대 등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2차전지 수요 비중이 전기차 9, ESS 1 정도로 전기차 배터리가 절대적인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LG화학이 4조원을 투자해 연산 12만t(톤)의 미국 최대 규모 배터리 양극재 공장을 건설한다. 사진은 LG화학 테네시 양극재 공장 예상 조감도. /LG화학 제공

자동차 업계도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對美) 자동차 수출액은 322억달러로 전년 대비 45% 증가했다. 역대 최대 실적이다. 미국 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친환경차 수출이 62% 증가한 게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전기차 수출액은 50억달러로 전년 대비 84% 증가했다. 미국의 전기차 보급 노력이 한국산 친환경차 수출이 증가로 이어졌는데,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이 완화될 경우 전기차 수출 증가세가 꺾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자동차 기업들은 미국의 상황 변화를 예의주시 중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2032년 오염물질 규제 최종 목표가 여전한 만큼 전동화 전환 작업은 계속 추진하되, 내연기관차와 전기차의 중간 단계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 다양한 라인업을 활용해 현지 정책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감소한 전기차 수요가 내연기관차의 수요로 이어져 자동차 수출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경유 산업연구원 시스템산업실장은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 다음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의 전기차 수요가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은 우려가 된다”면서도 “감소한 전기차 수요는 내연기관차로 전환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수요는 케이(K)-자동차 업체에도 들어와 감소분을 상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혁종 부연구위원도 “한국의 전기차가 잘 나가고 있지만, 내연기관차의 수출 비중도 여전히 크다”면서 “포트폴리오를 고려할 때 국내 자동차 산업에 악재로만 보긴 어렵다”라고 했다.

관가에서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국 산업 보호 정책과 이를 만회하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산업 정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국내 산업에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던 전망이 현실화하는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과 관련해 구체적인 내용이 공식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미국 측 정책 발표와 언론 보도 등을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의 정책 전환이 이슈가 되고 있어 예의주시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 블루칼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등 산업·에너지 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한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직 관료들은 재집권 구상을 담은 ‘프로젝트 2025′에서 “(IRA법은) 재생에너지 개발 업체와 특수이익 단체에 수천억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라며 “이미 지급된 보조금을 제외한 모든 자금 지원을 폐지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