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6일, 사우디 리야드의 엑스포 부지 뒤로 노을이 지고 있다. 2030 엑스포 부지로 예정된 넓은 땅엔 나무 몇 그루와 지점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말뚝이 전부였다. /윤희훈 기자

지난달 1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관문인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킹 살만 빈 압둘아지즈 로드’를 10여분 달렸다. 도시 초입에서 광활한 ‘2030 리야드 엑스포’ 부지를 만났다. 철조망으로 외부인의 접근을 막아둔 부지의 면적은 4~5㎢로, 여의도(2.9㎢)보다 더 넓다.

황토색으로 점철된 광활한 부지엔 나무 몇 그루와 토지를 구분하기 위해 박아둔 말뚝 정도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몇 대의 건설장비가 현장을 오가긴 했지만, 본격적인 건설공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사우디는 이 곳을 첨단 기술을 집약한 ‘엑스포 시티’로 개발할 방침이다.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외무부 장관은 지난해 6월 국제박람회기구 총회 프리젠테이션에서 “사우디는 2030년까지 3조3000억달러(약 4314조7500억 원)를 투자할 예정”이라면서 “이 중 30% 이상을 리야드에, 엑스포에는 78억달러(한화 10조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세워질 예정인 정육면체 형태의 마천루 '뉴 무카브'. /사우디 국부펀드

리야드 엑스포 시티는 2020년 엑스포를 치른 두바이의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 기반 경제에서 탈탄소·기술 기반 국가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활용하겠다는 게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이미 발표한 ‘뉴 무라바’(새로운 광장) 프로젝트도 엑스포 비전의 일환이다. 뉴 무라바 프로젝트는 리야드 북서쪽 도심 지역에 가로, 세로, 높이가 400m인 거대한 정육면체 건축물(무카브)을 2030년까지 짓는 사업이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20개 집어넣을 수 있는 크기다. 10만 4000개의 주거 공간과 9000개의 호텔 객실, 98만㎡의 상업 공간, 140만㎡의 사무 공간, 62만㎡의 레저시설, 180만㎡의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게 사우디 국부펀드 ‘PIF’의 설명이다.

무카브 외에도 다양한 건물들이 리야드에 들어설 예정이다. 사우디 정부는 이렇게 생겨날 건물을 세계 각국의 기술 기업으로 채우겠다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허브를 넘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테크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리야드를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다.

엑스포 시티에서 차를 타고 5분여를 더 가면, ‘로샨 프론트’가 나온다. 애초 이곳의 지명은 ‘리야드 프론트’였다. 리야드의 초입부라는 데서 이름을 따왔다가, 2020년 ‘PIF’가 운영하는 부동산 개발업체 ‘로샨’이 출범하면서 명칭을 바꿨다.

로샨 프론트에는 우리 중소벤처기업부와 사우디의 투자부(MISA)가 협업해 만든 ‘리야드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가 입주해 있다. GBC는 국내 중소·벤처기업의 사우디 진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사무 공간이다. ‘위워크’처럼 사무를 볼 수 있는 공용 공간과 회의 등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로샨 프론트. 좌측의 빌딩 형태 건물에 한국 중소벤처기업부와 사우디 투자부가 협력해 조성한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가 입주해 있다. /윤희훈 기자

현재 이곳에는 사우디에서 사업을 막 시작한 건설 드론 데이터 솔루션 업체인 ‘엔젤스윙’과 이스포츠 프로덕션 업체인 라우드(LOUD) 등 국내 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 외에도 사우디에 스마트팜을 수출할 드림팜, 제약사 GL라파, 친환경소재 개발업체인 ‘마린이노베이션’ 등 18개 업체가 입주를 준비 중이다.

김형록 리야드 GBC 소장은 “물가가 높아 부동산 임대료가 서울 이상인 리야드에서 이러한 사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경비 부담이 큰 중소·벤처기업에 큰 힘이 될 것”이라면서 “중소·벤처기업이 모여 일하면서 정보를 공유하고, 접촉 채널을 소개해주는 등 시너지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미스터 에브리씽’(빈 살만 왕세자의 별명)의 국가 개조 작업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우디의 대대적인 혁신 과정은 한국의 기술 기반 벤처기업 입장에서 상당한 기회다. 특히 대형 빌딩 등의 착공과 준공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만큼 ‘콘테크’ 업체가 가장 먼저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인다.

건설사업관리(PM)업체인 한미글로벌은 네옴시티 관련 8개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발주처에 건설 사업 전반의 핵심 관리 항목을 분석해 제공하는 시스템 ‘특별 총괄 프로그램 관리’(e-PMO)를 한미글로벌이 맡았다. 이 외에도 로쉰 주거단지 (155억원), DGDA(440억원), 네옴시티 건설근로자 숙소단지(2023년) 등도 한미글로벌이 맡는다.

남새별 한미글로벌 중동법인장은 “사우디 정부의 ‘비전 2030′ 정책으로 네옴시티 외에도 동계 아시안게임, 엑스포, 월드컵과 관련된 초대형 프로젝트 발주가 계속 나올 것”이라면서 “사우디 외에도 UAE와 카타르 등에서도 신재생에너지 및 제조기반 확대 관련 프로젝트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사우디 중소기업청이 주최한 ‘BIBAN 2023′에서 우승한 ‘엔젤스윙’도 사우디에서의 사업을 늘려가고 있다. 이 업체는 드론을 활용해 건설 시공 및 안전을 관리하는 솔루션을 제공한다.

사우디 최대 의료법인인 술라이만 알-하빕 메디컬 그룹의 병원에서 부인과 전문의로 활동하는 파티나 알 타한 교수가 AI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다. /윤희훈 기자

바이오·의료 산업도 촉망받는 분야로 손꼽힌다. 정부 관계부처에 따르면 사우디는 130여개 병원을 연결한 가상병원 프로젝트를 보건 의료 최우선 과제로 추진 중이다. 한국의 바이오헬스 기술 기업으로선 매출 확대와 경험 축적 ‘두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다.

현재 국내 업체 중에선 의료 인공지능(AI) 기업 ‘루닛’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루닛은 지난해 10월 사우디 보건부 산하 SEHA 가상병원(SVH)과 AI 솔루션 공급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사우디 최대 규모의 민간 의료기관 술라이만 알-하빕 메디컬 그룹(HMG) 계열 병원에는 엑스레이 영상 AI 분석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 MMG’를 공급한다. 루닛 인사이트 MMG는 유방암 검진을 위한 마모그램 엑스레이를 분석해 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솔루션이다. 전문의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유방의 이상 징후를 찾는 것으로 전해졌다. 루닛은 유방암 관련 솔루션인 MMG 외에도 폐암 진단 솔루션인 ‘루닛 인사이트 CXR’을 사우디의 ‘내셔널 가드 병원’과 ‘킹 압둘아지즈 메디컬시티’ 등에 공급할 예정이다.

HMG 병원에서 부인과 전문의로 근무하는 파티나 알 타한 교수는 “루닛 솔루션을 도입함으로써 선별 정확도가 높아졌고, 불필요한 추가 검사가 줄었다”면서 “의심되는 부위에 대한 추가 영상 촬영 여부도 AI가 결정을 해줘, 업무 체계를 효율화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파티나 교수는 “이러한 AI 기반 기술은 사우디의 의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베테랑 의사에겐 업무의 선택과 집중을, 주니어 의사에겐 검진 정확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솔루션”이라고 덧붙였다.

이정열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장이 지난 2023년 12월 11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SKSH 병원의 혁신 목표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윤희훈 기자

한국의 선진 의료 기술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현재 UAE 라스 알 카이마에선 서울대병원이 왕립 종합병원인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SKSH)을 위탁 운영 중이다. 2014년부터 위탁을 맡아 5년 차인 2019년 재위탁을 하게 됐다. UAE의 토호국 중 하나인 라스 알 카이마는 올해 서울대병원에 재차 위탁을 맡길 것인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SKSH는 암·뇌신경·심장 전문 병원이다. 당초에는 종합병원으로 운영됐으나, UAE 정부의 병원 구조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핵심 질환 3개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로 전환됐다.

현재 이 곳에선 의료진 등 104명의 한국인(의사 38명, 간호사 21명)이 근무를 하고 있다. 전체 직원(668명)의 15.6%가 한국인이다.

위탁 운영 연장 여부 결정을 앞둔 서울대병원은 병원 개혁 작업에 능한 이정열 전 중앙보훈병원장을 셰이크칼리파병원장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혁신 작업을 추진 중이다. 다만 현지 정부에서 병원 관리를 질적 성장보다 비용 절감에 집중하고 있어, 계약 연장을 낙관하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현지 관계자는 전했다.

이정열 원장은 “UAE 정부는 사업 초기에는 외국인 전문가에 의존하다, 어느정도 안착이 되면 현지인화(Emiratization)를 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면서 “2차 계약 연장을 통해 위탁 운영을 지속하게 된다면 상당한 성과가 될 것이다. 보건 의료를 통한 K-의료의 전파와 국가 간 우호 증진 도모에도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은 서울대병원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한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