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통화정책의 최대 변수로 부상했다. 가파른 금리 인상이 SVB 파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된 만큼, 연준의 긴축 기조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당장 연준이 다음주에 열리는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할지 여부와 연준 위원들이 예상하는 최종금리 수준이 어느 정도로 높아질지에 따라 한국은행의 금리 결정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시장은 연준의 금리 인상폭이 축소되면서 한국은행이 4월에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3.5%로 동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제롬 파월 의장이 이끄는 미국 연준이 3월에 빅스텝을 단행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조선비즈DB

◇ “SVB 파산으로 금융시스템 강하다는 인식 흔들려”

13일 로이터통신은 “SVB 붕괴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견고하다는 연준의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연준은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한 은행의 자본 건전성 강화 조치와 연례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재무건전성 평가) 덕에 미국의 금융 시스템의 기초 체력과 회복력이 10년 전과 달리 강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미 서부 스타트업의 돈줄 역할을 해온 SVB가 36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하면서 미 금융 시스템이 생각했던 것보다 취약하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SVB 붕괴의 여파로 뉴욕주 소재 시그니처은행마저 문을 닫으면서 이번 사태가 은행 연쇄 부도와 같은 금융권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한층 높아졌다.

이날 미 정부는 SVB에 고객이 맡겼던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보증한다고 발표하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당분간 글로벌 금융시장 불확실성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일(현지시각)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SVB) / 연합뉴스

◇ 채권시장 3월 빅스텝 전망 40%→0%로 추락

특히 이번 사태가 연준의 금리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의견이 많다. 당초 시장에서는 연준이 오는 21~22일(현지시각) 열리는 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지난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미국의 물가 둔화 속도가 더디고, 고용지표가 예상보다 강하다는 점을 들어 추가 금리 인상을 시사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폭의 금리 인상이 은행 부도와 같은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긴다는 우려에 연준이 고강도 긴축에 제동을 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졌다. 빅스텝 전망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연준의 금리 인상폭을 가늠하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 그룹의 페드워치(FedWatch)에 따르면 연준이 3월 FOMC에서 빅스텝을 단행할 확률은 이날 오전 한때 제로(0%)로 떨어졌다. SVB 붕괴가 발생하기 직전인 지난 10일에는 이 확률이 40%에 달했다. 반면 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예상한 비율은 97.4%로 뛰었다.

SVB가 몰락한 원인으로는 무리한 ‘몰빵 투자’와 금리 인상이 꼽힌다. SVB는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저금리로 조달한 단기 자금을 미 장기 국채, 주택저당증권 등 장기 자산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연준의 고강도 긴축으로 자금이 부족해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IT 기업들이 예금 인출에 나서기 시작했다. SVB는 갑자기 늘어난 고객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보유 자산을 매각했고, 18억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그간의 금리 인상으로 채권가격이 급락한 영향이다. 연준은 지난해 초 0%에 가까웠던 기준금리를 4.5~4.75%까지 빠르게 인상했다.

이에 SVB는 채권 손실을 메우기 위해 20억달러 규모의 유상증자를 시도했으나, 오히려 위기를 인지한 투자자들이 대량 예금인출(bank run·뱅크런)에 나서면서 결국 파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사태로 금융시장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연준이 빅스텝에 나설 것이란 기존 전망이 힘을 잃었다”고 전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 “2월 美 물가지표가 3월 금리 인상폭에 영향”

시장 전문가들은 연준이 SVC 사태가 향후 투자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다음주까지 연달아 발표되는 굵직한 경제지표를 토대로 금리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3월 FOMC 직전까지 연준의 금리 인상폭에 대한 시장 전망은 수시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행도 3월 FOMC 결과가 나온 뒤에야 통화정책 방향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물가 흐름, 연준의 3월 금리 인상폭, 최종금리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뒤에 추가 금리 인상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시장 전망대로 연준이 금융시장 혼란을 고려해 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경우 한국은행도 4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은행은 연준 금리 결정을 보고 움직일 것이고, 연준은 다음주 물가지표를 확인한 뒤에 다음 행보를 결정할 것”이라며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예상치에 부합하는 수준만 나와도 점진적 인상 기조는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SVB 사태로 연준의 3월 빅스텝 가능성이 작아지면서 기준금리 흐름에 민감한 국내 3년 만기 국고채(국채) 금리가 한 달 만에 다시 기준금리(연 3.5%) 밑으로 떨어졌다. 이날 오후 2시 기준 국채 3년물 금리는 연 3.48% 수준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채권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다음달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연준이 긴축 속도를 조절할 것이란 관측에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이날 원·달러 환율도 22.4원 급락한 1301.8원에 마감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전 거래일보다 1.01% 급락한 103.495를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