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들어 가파르게 치솟던 국제유가가 7주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배럴당 80달러를 웃돌던 유가는 현재 70달러 중반대에서 거래 중이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유럽 주요국이 봉쇄 조치를 시행하면서 원유 수요가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커지자, 유가도 하락세로 돌아선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시장에서는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연말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지만, 그간 물가 상승을 주도해온 유가가 최근 내리면서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우려가 완화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최근 급증하자 22일부터 시민 외출을 제한하는 봉쇄 조치를 시행하기로 했다. 사진은 '코로나 봉쇄·백신 의무화' 항의하는 오스트리아 시위대.

◇ 美·유럽 ‘5차 대유행’ 우려에 유가 하락

22일 미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날보다 0.57달러(0.51%) 내린 배럴당 75.55달러에 거래 중이다. 브렌트유 역시 0.57달러(0.72%) 하락한 배럴당 78.32를 기록하면서 80달러선 아래로 미끄러졌다. WTI와 브렌트유 모두 지난달 1일 이후 약 7주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코로나 재확산에 따른 주요국의 봉쇄 조치와 유가 안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유가를 끌어내린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달러화 강세 현상도 유가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겨울철을 앞두고 이달 들어 미국과 유럽에서는 코로나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자 유럽 각국은 봉쇄 조치를 포함해 방역 고삐를 다시 죄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22일부터 생활 필수품 구매 등의 상황을 빼고 외출을 전면 제한하는 봉쇄 조치를 최대 20일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독일도 감염률이 높은 지역에 일주일간 봉쇄령을 내리는 등 방역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의 질병관리청에 해당하는 독일 로베르트코흐연구소(RKI)의 로타 빌러 소장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5차 대유행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위치한 전략 비축유(SPR) 저장고 전경. /EPA 연합뉴스

선진국을 중심으로 당분간 원유 수요가 위축될 수 있다는 전망에 유가도 상승 동력을 잃고 하락한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미국이 중국, 일본, 인도, 한국 등에 전략비축유(SPR) 공동 방출을 요청한 소식도 유가를 끌어내린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략비축유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국과 같은 비산유국이 비축해두는 3개월 분의 원유를 뜻하는데, 이를 풀면 원유 공급이 늘면서 유가도 하락 압력을 받게 된다.

최근 고유가에 힘입어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대로 치솟으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뚝 떨어지자, 백악관이 ‘물가 안정’ 차원에서 비축유 방출 요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미 경제방송 CNBC는 21일(현지시각) “국제유가는 일본 등의 전략비축유 방출 가능성과 유럽의 심각한 코로나 재확산 영향으로 7주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 유가, 공급 늘면서 안정 VS 코로나 확산 진정되면 반등

다만 시장에서는 향후 국제유가 전망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이 인플레이션 억제 차원에서 유가 안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가운데 겨울철 코로나 재유행 여파로 유가가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반면, 일각에서는 여전히 상승 재료가 많기 때문에 내년까지 강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실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달 발간한 정례 보고서에서 원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유가 고공행진도 멈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IEA는 “아직 국제 원유 시장은 수급이 빠듯한 상태지만, 현재 유가가 미국 등 다른 국가들의 증산을 강하게 부추기고 있다”며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미국 원유 생산과 원유 시추공 수가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유가 공급 확대에 따른 유가 하락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유가 급락이 반가운 이유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둔화될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라며 “지난 10월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이 에너지 가격이었는데, 유가 수준이 70달러 중반 수준에서 안정을 유지한다면 시차를 두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플레이션 리스크 둔화는 소비심리 반등으로 이어지면서 연말 소비경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최근 유가를 끌어내린 요인이 장기적으로 유가 안정을 주도하지 못할 것이란 반론도 제기된다. 최진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럽의 연쇄 봉쇄 가능성은 우려되지만 백신 접종률이 평균 60%를 상회한 상황에서 지난해와 같은 시장 충격이 반복될 가능성은 낮고, 코로나 확산세 역시 이미 계절화된 점을 감안하면 유가는 7~8월과 마찬가지로 10월 고점대비 15~18% 조정 후 반등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도 세계 경제가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수요가 늘면서 국제유가, 천연가스, 석탄 가격이 내년 초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은 관계자는 “여기에 탄소중립 추진이라는 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해 에너지 가격 상승이 장기화되고, 예상치 못한 수급불균형이 빈번히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