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국채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면서 시장에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물가상승을 동반한 경기침체)’ 공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 들어 미국 등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의 물가가 동반 상승하는 가운데 코로나 델타 변이 바이러스라는 악재를 만난 세계 경제의 회복 속도가 둔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이 재발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예측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주요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극도로 완화적인 통화·재정정책을 펼치면서 ‘스태그플레이션 부채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돈 풀기 정책으로 자산시장이 이미 과열된 상태에서 공급망 충격이 가해질 경우 세계 경제가 고물가와 저성장이라는 악재를 동시에 겪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 증권거래소 주식 중개인의 근무 모습.

◇ ‘저성장’ 우려에 美 10년물 국채금리 하락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단어다. 일반적으로 경기 호황기에는 소비가 살아나면서 물가는 오르고, 경기가 나빠지면 소비가 위축되면서 물가도 하락한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은 저성장과 고물가가 공존하는 형태의 경기 불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경기 부양을 목표로 돈을 풀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 커질 수 있고,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는 긴축적 통화정책을 펼치면 실물경제가 얼어붙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딜레마로 인해 정부 정책이 최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미국은 지난 1973~1975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11%로 두자릿수를 기록했고, 경제는 역성장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당시 중동전쟁이 촉발한 ‘오일쇼크(석유파동)’로 유가는 급등하고 공급망이 무너진 가운데 주요국이 경기 부양을 위한 확장적 재정정책과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치면서 미국을 시작으로 주요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진 것이다. 미국은 1979년 폴 볼커 전 의장이 이끌었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린 뒤에야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근 시장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 거론되는 이유는 채권시장의 변동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표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대표적이다. 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지난해 말 0.9%선에서 등락하다가 올 들어 가파르게 오르면서 지난 3월 1.75%로 고점을 찍었다. 미 경제가 지난해 코로나 부진을 딛고 빠르게 회복할 것이란 기대감이 채권시장에 반영된 것이다. 이후 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지난달 1.4%선으로 조정됐고, 지난주에는 코로나 재확산 여파로 ‘경기 낙관론’이 힘을 잃으면서 1.18%까지 급락했다.

지난 6월 미 소비자물가가 5.4% 치솟으면서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경제성장률도 양호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장기 국채금리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이나 경제 성장이 예상되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커지고, 이에 따라 국채금리도 오른다. 그러나 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한달 째 하락세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자들이 인플레이션보다 저성장을 더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세도 저성장 우려를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CNBC는 “물가 상승이 지속되는 가운데 델타 변이가 빠르게 확산되면 경제 성장이 더뎌지고 공급망 병목현상이 장기화하면서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면서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국제유가가 올 들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배럴당 70달러를 웃돌고 있다는 점과 각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목표로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 투자은행 “‘경기 고점’ 아냐…하반기 성장세 지속”

반면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며, 세계 경제가 코로나 충격을 딛고 지속 성장하면서 국채 금리도 장기적으로 상승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코로나 기저효과가 사라지면서 하반기 경제 성장 속도는 상반기과 비교해 둔화되겠지만, 이는 회복 초기에서 지속적인 확장국면으로 이행하는 과정일 뿐이며, 미 경제가 정점을 찍었다는 우려는 과도하다는 견해다. 모건스탠리는 “미국 가계의 초과 저축 규모가 2조3000억달러로 크게 증가한 상황에서 직접적인 재정지출이 감소하더라도 가계 소비 증가로 인해 그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며 진단했다.

또 하반기 백신접종이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까지 확대될 예정이고, 기존 백신이 입원율과 사망률에 있어 높은 효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백신 생산량이 131억회분까지 증가할 전망”이라며 “이는 신흥국의 경기회복, 공급망 정상화로 이어지면서 미국 경제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백신 접종이 늘면서 델타 변이 관련 우려가 진정되고, 이에 따라 경기 회복 기대감도 커지면 10년물 국채 금리도 높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블랙록은 “미 국채시장은 매우 고평가된 상태”라며 연말까지 국채 금리가 상승(국채 가격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UBS도 “미 10년물 국채 금리가 올해 2%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