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훈 금융2팀장

최근 가상자산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의 출시 여부다. 블랙록 등 여러 금융사들이 출시를 신청한 이 새로운 금융 상품이 내년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승인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기초자산이 되는 비트코인의 가격은 한 달여 간 30% 넘게 상승했다.

비트코인 현물 ETF의 등장은 가상자산이 본격적으로 제도권 금융의 테두리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ETF는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 때문에 금융 당국의 관리와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또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자금이 유입되고, 체계적인 위험 관리가 이뤄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 동안 검증되지 않은 고위험 자산 정도로 평가절하돼 왔던 가상자산이 법적, 재무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셈이다.

지난 21일(현지시각)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가 미국 정부로부터 거액의 벌금을 부과 받은 점에 대해서도 오히려 가상자산 시장이 성숙해가는 과정이라며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많다.

바이낸스는 이란, 시리아 등 미국의 제재 대상 국가의 돈세탁과 가상자산 거래 등을 방조한 혐의를 인정하고 43억달러(약 5조5000억원)의 벌금을 내기로 미국 법무부, 재무부와 합의했다. 최고경영자(CEO)인 자오창펑도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로 오랜 기간 가상자산 시장을 짓눌러 왔던 규제 불확실성이 해소돼 투자 안정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실제로 바이낸스에 대한 처벌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4% 이상 떨어졌던 비트코인 가격은 이튿날 반등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가상자산이 금융 시장의 새로운 주역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늘면서 제도를 정비하고 육성하려는 각 국의 움직임도 최근 빨라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이미 전 세계 주요 국가 중 최초로 지난 4월 가상자산을 포괄적으로 관리하는 법인 미카(MiCA·Markets in Crypto Asset Regulation)를 통과시킨 바 있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곳은 일본이다. 일본 의회는 지난해 스테이블코인(달러화 등 기존 화폐에 가치가 고정되는 가상자산)의 발행과 유통 관리, 자금 세탁 방지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금결제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세율 인하 등을 담은 ‘백서’를 발행해 기시다 내각의 가상자산 시장 육성 의지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비트코인 현물 ETF의 승인을 여부를 고심하며 제도적 기반을 다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이 가상자산 산업을 주도하기 위해 발 빠르게 나서고 있는 반면, 국내 금융 당국과 정치권의 움직임은 한 없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상자산을 다루는 법안은 지난 6월에야 겨우 1단계에 해당하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산업 전반에 대한 포괄적 규제는 고사하고 가상자산의 상장이나 발행, 공시 등에 대한 법적 기준도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1단계 법안도 당시 김남국 무소속 의원의 코인 대량 보유 파문으로 정치권이 부랴부랴 움직였기 때문에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금융 당국 역시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긴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국내에서도 가상자산을 규제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제기돼 왔지만, 당국은 “미국 등 주요 국가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움직이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해 왔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해서도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의 정책 방향이 확정되지 않았고 비트코인의 법적 성격조차 불분명하다는 점 등을 들어 상황만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SEC가 내년 1월 비트코인 현물 ETF의 승인을 결정할 경우 비트코인은 물론 가상자산 시장 전체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여러 가상자산 ETF가 상장돼 활발하게 투자가 이뤄질 4월에 국내에서는 총선이 치러진다. 새롭게 상임위원회를 구성한 후 하반기가 돼서야 2단계 법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만약 다음 국회에서도 여야 간 정쟁이 격화되고 금융 당국이 법안 논의에 계속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할 경우 가상자산 시장을 관리하는 제도적 기반의 완성은 더욱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주도할 새로운 금융 자산의 영역에서 입맛만 다시고 있을 처지로 전락할지 모를 일이다. 더 이상 남들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때가 아니다.

[진상훈 금융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