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AI가 인공지능(AI) 인프라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확보를 위해 삼성전자와 독자적인 협력 라인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의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보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사라 프라이어 오픈AI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달 중순 방한 일정 중 삼성전자 경영진과 비공개로 만나 6세대 HBM(HBM4) 공급 및 확산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양측은 HBM4 양산 시점과 공급 안정성, 중장기 협력 구조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접촉은 단순한 기술 협의를 넘어 AI 시대 핵심 부품 주도권을 둘러싼 전략적 포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프라이어 CFO는 이번 방한 기간 중 SK네트웍스 및 업스테이지 경영진과 회동하는 등 대외 활동을 가졌으나, HBM 시장의 또 다른 축인 SK하이닉스와는 별도 면담 없이 삼성전자와의 논의에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은 이를 두고 오픈AI가 특정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대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삼성전자를 핵심 파트너로 낙점해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오픈AI는 최근 AI 모델 고도화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자금 부담과 메모리 공급난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오픈AI 측이 메모리 업체들에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할 만큼 수급 상황이 절박하다"며 "수직 계열화된 공급망을 갖춘 삼성전자가 오픈AI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가장 매력적인 파트너로 부상한 것"이라고 했다.
프라이어 CFO의 이번 행보는 오픈AI가 추진 중인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구축 프로젝트 '스타게이트' 및 자체 AI 반도체 '타이탄' 개발과 직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작년 10월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메모리 공급 의향서(LOI)를 체결한 바 있으며, 이번 논의는 이를 바탕으로 타이탄 칩에 삼성 HBM4를 탑재하는 방안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분석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양사의 이번 논의가 '타이탄 칩' 개발에 보다 집중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오픈AI가 최근 미국 텍사스·영국에 이어 노르웨이에서 추진하던 스타게이트 데이터센터 사업 철수를 결정한 데다, 이 사업을 담당하던 임원들도 퇴사하는 등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픈AI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최근 엔비디아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자체 AI 칩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 때문에 SK하이닉스보다 삼성전자와의 협력을 우선순위로 뒀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타이탄 개발에 더 우수한 제품을 공급받고자 하는 오픈AI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5세대 HBM(HBM3E)까지는 SK하이닉스가 시장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HBM4로 넘어오면서 삼성전자가 부상하고 있다"며 "삼성전자가 설계 변경 이슈 없이 제품을 양산 출하한 점이 이번 프라이어 CFO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AI 모델이 스스로 데이터를 생성하고 학습하는 '자가 발전' 구조로 진화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더욱 폭증하는 추세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AI 학습 데이터로 AI가 생성한 자료를 쓰면 성능이 떨어지는 문제를 오픈AI가 최근 극복한 것으로 안다"며 "AI 자가 발전이 가능해지면서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저장할 메모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이번 방한의 주요 배경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HBM4를 기점으로 AI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 경쟁이 기술력을 넘어 '안정적인 대규모 공급 능력' 싸움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오픈AI와의 협력을 지렛대 삼아 HBM 시장의 판도를 재편하고,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