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반도체 패키징의 '게임 체인저'로 꼽히는 유리기판 상용화 경쟁이 기술 발표 단계를 넘어 실질적인 양산 준비 국면에 진입했다.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존 기판(FC-BGA)의 물리적 한계가 부각됐고, 열 안정성과 미세회로 구현에 유리한 유리기판이 핵심 대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장의 관심도 기술 경쟁을 넘어 양산 시점과 수익화 가능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유리기판을 차세대 패키징 핵심 기술로 제시하며 시장 선점에 나섰다. 10년 이상 연구개발(R&D)을 이어온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 챈들러 시설에 10억달러(약 1조4835억원) 이상을 투입해 R&D 및 파일럿 인프라를 구축했다.
인텔 기술의 핵심은 자체 첨단 패키징 솔루션인 'EMIB(Embedded Multi-die Interconnect Bridge)'와 차세대 기판 기술의 결합에 있다. EMIB는 서로 다른 칩을 고속으로 연결하는 인터커넥트 기술로, 일부 고성능 제품에 적용되며 성능 확장성을 입증한 바 있다.
유리기판은 기존 소재 대비 더 미세한 배선과 대면적 패키징이 가능해 칩 간 연결 구조를 한층 확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서로 다른 칩을 하나의 시스템처럼 묶을 수 있게 되며, 데이터 이동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손실을 줄여 AI 연산 효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기대된다. 인텔은 이러한 패키징 기술과 기판 혁신을 바탕으로 2030년까지 패키지당 1조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하며 차세대 패키징 구조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인텔이 노리는 것은 단순한 기술 우위를 넘어 '표준 선점'이다. 유리기판 기반 구조가 차세대 패키징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경우, 인텔이 제시한 설계와 연결 방식이 업계 표준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파운드리와 패키징 생태계 전반의 규격을 사실상 주도할 수 있다는 의미로, AI 반도체 시장에서 구조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다만 현재는 기술 구현과 신뢰성 검증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업계에서는 안정적인 대량 양산 시점을 2027년 이후로 보고 있다. 인텔이 기술과 생태계 측면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실제 상업화 경쟁은 이제 시작 단계라는 분석이다.
삼성전기는 기술 경쟁과 동시에 '고객 실리'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최근 브로드컴에 이어 애플에도 유리기판 샘플을 공급하며 글로벌 빅테크의 검증 라인에 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 사업장에 구축한 파일럿 라인을 통해 시제품을 생산 중이며, 올해 시생산을 거쳐 2027년 이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텔이 기술 방향성과 생태계를 앞세운다면, 삼성전기는 애플 등 핵심 고객 접점을 선점해 상업화 성과를 먼저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SKC의 자회사 앱솔릭스는 생산 인프라 측면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 주자로 꼽힌다. 미국 조지아에 전용 생산거점을 구축했으며, SKC는 약 1조원 규모의 유상증자 자금 중 5900억원가량을 제품 개발과 공정 안정화에 투입할 계획이다. 다만 현재는 글로벌 고객사 인증과 경제성 있는 수율 확보라는 과제가 남아 있으며, 상용화 속도는 시장 기대 대비 다소 신중해진 분위기다. 설비를 먼저 갖췄더라도 실제 경쟁력은 공정 완성도와 수율 확보 수준에 따라 판가름 날 전망이다.
LG이노텍은 시장 수요를 살피며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유리 정밀가공 업체 유티아이와 협력해 원천 기술을 강화하는 한편, 국내 사업장에 시범 생산 라인을 구축해 개발을 진행 중이다. 문혁수 사장이 양산 목표 시점을 2028년으로 제시하면서도 시장 수요 본격화 시점은 2030년 전후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무리한 속도전보다 기술 완성도와 시장 타이밍을 맞추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유리기판 시장은 연구개발 단계를 넘어, 안정적인 수율로 실제 매출을 창출하는 기업이 주도권을 쥐는 '양산 경쟁'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며 "글로벌 고객사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해 실제 공급으로 이어지는 시점이 시장의 본격적인 개화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