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가격 상승의 원인이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기판과 소재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가 고수익 부품을 흡수하면서 일반 PC용 공급망이 구조적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3일 업계와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 등에 따르면, AI 인프라 확대로 고부가 부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제조사들이 한정된 생산라인과 원자재를 수익성이 높은 제품에 우선 배정하는 '자원 재배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고성능 제품 확대가 범용 부품 수요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낙수효과'가 작동했지만, AI 시대에는 오히려 범용 부품의 생산 설비와 원재료가 AI 전용 라인에 잠식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 돈 되는 'AI 기판'에 올인… 범용 라인은 찬밥 신세
가장 먼저 병목 현상이 나타난 곳은 기판 분야다. 국내 주요 업체들은 일반 PC용 메인보드 기판 대신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성능 기판으로 생산 체제를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대덕전자가 AI 및 전장용 FC-BGA 비중 확대에 힘입어 올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FC-BGA는 반도체 칩과 기판을 전선 없이 직접 연결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대화한 고성능 기판으로, AI 서버와 자율주행의 '신경망'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심텍 역시 미세 회로를 정밀하게 쌓아 올리는 mSAP(변형 반가공 공법) 공정을 중심으로 고부가 기판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mSAP는 불필요한 구리를 깎아내는 대신 필요한 회로만 도금해 회로 간격을 초미세화하는 기술로, 고성능 반도체의 소형화·고밀도화에 필수적이다.
FC-BGA 등 고성능 기판은 단가와 수익성이 범용 제품 대비 월등히 높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동일한 생산라인에서도 '제품 믹스(구성)' 전환만으로 실적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구조다. 이 같은 생산 재편은 곧바로 수급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일부 범용 PCB의 경우 과거 6주 수준이던 리드타임(주문부터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이 최근 24주(약 6개월) 수준까지 늘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기판의 뼈대가 되는 동박(얇은 구리막)과 이를 고정하는 레진(절연 수지) 가격 상승도 제조 원가를 압박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기판 원가가 PC 전체 제조 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예년 대비 1.5배 이상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 반도체는 AI, 껍데기는 수급난… '이중 부담'에 갇힌 PC
소재 가격 부담은 플라스틱 수지로도 확산 중이다. 미·이란 갈등 등 지정학적 리스크로 나프타 가격이 상승하면서, 이를 원료로 하는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 가격이 동반 상승했다. 이들 소재는 PC 케이스와 내부 절연 부품 등 전반에 사용되는 필수 자재로, 가격 상승분이 즉각 완제품 원가에 반영된다. 반도체는 AI 수요로, 외장과 부속 소재는 에너지 가격으로 동시에 압박받는 '이중 부담'이 형성된 셈이다.
유통 현장에서는 가격보다 물량 부족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용산 전자상가 관계자는 "메모리는 비싸더라도 구할 수 있지만, 보급형 메인보드나 케이스는 제조사가 생산 비중을 줄여 물량 확보 자체가 어렵다"며 "총판에서 물건을 배정받는 것 자체가 전쟁이 됐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부품 재고 부족으로 인한 조립 PC 납기 지연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보급형 PC 시장의 소멸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가트너는 부품 가격 상승이 이어질 경우 2026년 말까지 PC 완제품 가격이 최대 20%까지 인상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경우 수익성을 맞추기 어려운 70만 원 이하 보급형 PC 시장은 사실상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PC 수요와 무관하게 글로벌 생산 역량 자체가 AI 서버로 이동한 상태"라며 "AI라는 블랙홀이 범용 IT 제품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공급망 소외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