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통해 제조 혁신을 이루겠다며 자본금 전액을 출자해 설립한 가우스랩스의 가치가 대폭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우스랩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혁신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면 SK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며 AI 도입을 주문한 지 1년 만인 2020년 8월 출범했다. 'SK그룹 첫 AI 전문 기업'을 표방하며 운영을 시작했으나, 설립 5년 넘게 이렇다 할 사업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우스랩스 고객사는 모기업인 SK하이닉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SK그룹이 엔비디아와 손잡고 작년 10월부터 '제조 AI 클라우드' 구축을 시작하면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엔비디아의 디지털트윈 플랫폼 '옴니버스' 등을 활용해 2030년까지 '자율형 공장'을 구현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AI가 현장을 이해하고 스스로 최적의 결정을 실행하는 제조 현장을 엔비디아와 함께 만들겠다는 것이다.
2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작년 말 가우스랩스의 장부금액을 252억9800만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작년 3분기까지 가우스랩스의 장부금액은 635억4400만원으로 평가됐는데, 한 분기 만에 60.2% 급락한 것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회수 가능 가액과 장부가액의 차이인 382억4600만원을 손상차손으로 인식시켰다.
SK하이닉스는 가우스랩스 출범 당시 자본금 5500만달러(당시 기준 약 630억원) 전액을 2022년까지 출자하기로 했다. 가우스랩스의 장부금액은 이에 따라 2020년 300억5600만원에서 2022년 635억4400만원으로 순차 증가해 작년 3분기까지 유지됐다.
SK하이닉스가 이번에 조정한 장부금액이 가우스랩스의 총자산(281억4100만원)보다 약 28억원 낮다는 점도 눈에 띄는 변화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사실상 가우스랩스의 사업 확장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평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 가상 계측 솔루션으로 SK하이닉스 공정 개선
가우스랩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설립된 뒤 한 달 만에 한국 사무소를 개소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제조 현장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생산 효율성을 높일 AI 솔루션 개발로 사업을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가우스랩스 기술을 통해 공정 관리·수율 예측·장비 유지보수·자재 계측·결함 검사·불량 예방 등 반도체 생산 공정 전반을 지능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우스랩스가 그간 성과를 내지 못한 건 아니다. 2022년 11월 센서 데이터를 활용해 제조 공정 결과를 예측하는 가상 계측(VM·Virtual Metrology) AI 솔루션 '파놉테스'(Panoptes)를 출시했다. 계측은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반도체 소자의 물리적·전기적 특성이 생산 공정별로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측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가우스랩스의 파놉테스는 물리적 계측 없이 공정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SK하이닉스는 박막 증착 공정에 파놉테스를 출시 한 달 만에 도입했다. 2024년 12월까지 웨이퍼 5000만장 정도를 가상 계측해 산포를 약 29% 개선하기도 했다. 산포는 생산된 제품들의 품질 변동 크기를 나타내는 지표다. 산포가 줄어들수록 불량 가능성도 낮아진다. 가우스랩스는 성능을 개선한 파놉테스 2.0을 2024년 8월 내놓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이 제품을 식각 공정에 접목하며 수율 향상을 노렸다.
SK하이닉스가 보유한 지분율은 가우스랩스 임직원의 주식선택권 행사에 따라 소폭 하락해 왔다. 그런데도 장부금액은 출자를 마친 후 약 3년간 변동이 없었다. 장부금액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건 가우스랩스가 실제로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정의 제조 효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 덕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누적 순손실 190억원… 기대 못 미친 사업 성과
다만 SK하이닉스 안팎에서는 가우스랩스가 그간 올린 성과가 연구개발(R&D) 수준에 그친다는 평가도 관측된다. 사업적 성과가 없어 법인으로서 실적을 올렸다고 보기보다는 'SK하이닉스 내 연구 조직' 수준에 머문 점이 한계라는 것이다. 가우스랩스는 출범 후 한 번도 순이익을 내지 못했다. 2021년부터 작년 말까지 누적 순손실 규모는 189억5800만원에 달한다.
고객사 확보에서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출범 초기에는 SK그룹의 에너지·바이오 등 제조 계열사는 물론 세계 시장에도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현재 SK하이닉스 외 뚜렷한 고객사는 없다.
SK하이닉스가 가우스랩스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AI 제조 혁신'을 엔비디아와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장부금액 변화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가우스랩스가 개발한 파놉테스는 엔비디아의 옴니버스와 유사하다. 두 플랫폼 모두 핵심은 디지털트윈에 있다. 현실 공간을 가상에 정밀하게 구현, 시뮬레이션(모의실험) 등을 진행하는 플랫폼이다. 제품 성능 향상이나 공정 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핵심인데, 옴니버스 기능이 더 폭넓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엔비디아의 옴니버스 도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엔비디아의 AI 칩으로 연산을 처리하는 옴니버스 기능은 업계 최정상급이란 평가를 받는다"고 덧붙였다.
가우스랩스는 설립부터 지금까지 김영한 대표가 이끌고 있다. 김 대표는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컴퓨터공학과 명예교수로 '데이터 사이언스' 전문가로 통한다. 최병원 가우스랩스 기술총괄(부사장)은 인텔코리아 상무 등을 지내며 AI 제품을 개발해 온 인물이다. 램리서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지낸 리처드 고트쇼가 수석 자문역을, 김윤 트웰브랩스 최고전략책임자(CSO)가 이사회 의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가우스랩스에 대해 "그룹 내 산업 AI 전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이제 막 시작한 회사"라며 "당장 수익 발생보단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드는 특성이 있어 장부상 회계 인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